뉴멕시코의 앨버커키에서-공옥자

2013-01-24     제주매일

      몇 년 전 어린 딸 데리고 공부하는 여식을 도울까하여 생소한 소도시 뉴멕시코 앨버커키에 한 달 여 머물렀었다. 따뜻한 날씨에다  학비가 비교적 부담이 적어 아시아 지역 유학생들이 많았다
  미국의 서남부 넓은 평원에 자리한 앨버커키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도시다. 사막이 가까운 탓인지 건조하고 온화한 기후가 외국인에게는 오히려 지루할 수도 있지만 도시 동북쪽에 높이를 알 수없는 산이 하나 둘러, 그나마  악센트를 주고 있었다. 기숙사가 밀집해 있고 서민들이 사는 학교주변엔 멕시코 풍의 붉은 사각의  토담집이 야트막하게 늘어서 단조롭다. 물론 시내 중심가는 서부극에서 보았던 술집들이 즐비하여 어느 모퉁이에 선가 총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뉴멕시코 주립대학이 이곳에 있어 젊은이가 넘치고 오고가는 그들로 하여 거리는 활기차다. 재미있게 본 것은 학생들 상당수가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힘차게 내달리고 있는 광경이었다. 기숙사에서 대학까지 그리 멀지 않으니 그게 통학 수단인 셈이다. 자전거도 많이 타고 덜덜거리는 자동차도 의젓하게 거리를 질주하고 있었다. 깨진 차창을 종이 박스로 막아 놓거나 긁히고 녹슨 차가 부지기수라는 건 경이로운 풍경이었다. 한국의 가리에선 눈 씻고 봐도 볼 수 없는 진풍경이다, 그들의 의복도 너무나 소탈하여 잘 차려입고 목에 힘을 주는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대학 구내에는 여기저기 거의 육 칠 십대로 보이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돋보기를 낀 체  독서에 열중하고 있어 만학의 열기를 실감케 했다. 그들을 보며 육십을 넘기자 이미 노인이라는 정신적 열패감을 느낀 내 자신의 조로증을 심각하게 자책하는 심정이 들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나이가 별 문제가 되지 않는지 백화점 카운터에도 은발의 할머니가 립스틱 붉게 바르고 명랑한 모습으로 계산을 하고 있었다! 수년전 여군에 입대했다가 만학으로 성공하여 미국에서 근무하던  선배가  60대 초반에 제주대학 의대객원교수로 초빙되어 2년인가 고향에 머물렀었다. 그 분의 이야기 중에 노후를 고국에서 보낼까하는 마음도 있었는데 나이를 너무 의식하게 만들어서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다며 도미해버렸던 기억이 났다
노인들을 폐차 취급하는 사회적 인식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르겠으되
그런 대접을 불러온 원인 제공자가 노인들 자신이 아닌지 성찰 할 필요는 잇을 것 같다. 젊은 세대에 짐이 아니라 도움이 되는 존재로 산다면 싫어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저녁  여섯시가 되기 바쁘게 해가 기우는, 시간의 중압을 밀어 내며 기숙사 구내를 산책 하러 나섰다. 
  중국유학생이 다수를 점유하고 있는데 그들에게선 소음이 없다. 대부분 책상에 앉아 책을 읽거나  PC 모니터를 드려다 보는 모습이다. 중국은 인구가 억을 헤아려 세계 도처에 나가 공부하고 연구하는 젊은이 들이 압도적으로 많아 보인다. 이들 젊은  지성들이 미래의 중국을 이끌어 가리라 생각하니 부럽고도 두려웠다. 여가시간의 태반을 TV 시청으로 떠들썩한 한국, 기성세대나 젊은 세대나 허욕에  들떠 있는 듯한 내 나라가 걱정스러웠다. 세계 유례가 없이 빠른 성장을 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대한 민국 국민임이 자랑스럽지마는  발밑이 위태로워 보이는 까닭이 뭘까. 저 차분하고 조용하게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중국의 젊은이들 앞에서 고국을 염려하는 노파심에 잠시 마음이 어두웠다.
 기숙사 구내를 몇 바퀴 돌고나서 언덕의 마른 풀 위에 앉았다. 종일 빛과 바람에 건조해진 풀들이 바스락 거리자 향긋한 풀 냄새가 코끝에 닿는다. 다리를 뻗으며 잔디에 누었다. 등 밑에 마른 풀의 감촉이 기분 좋게 전달되어 온다. 서서히 몸속으로 피어오르는 평안, 생의 순간들을 잘게 쪼개면 불행은 없다고 누군가 말했다. 과거와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현재엔 불행이 없다고. 과거의 기억과 그 기억에 동승한 감정들에 시달리고, 미래에 대한 욕망과 그 욕망을 부추기는 담금질에 몰입되어, 현재란 단지 과거와 미래의 교차점일 뿐, 삶의 순간마다 시간의 틈새로 섬광인 듯 오는 지복을 놓치고 일상에 매몰되어 산다는 것이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처럼 잔디에 누워 저녁 하늘에 떠있는 구름을 보는, 지상의 한 지점이 그냥 그대로 거칠 것이 없는 자유였다. 향수가 피어올랐지만 갈증이 아니었다. 입안 가득한 과즙 같은 감미로움,  겨울 난로 가에 번지는 훈기처럼, 아니 찰랑이며 솟는 샘물 같은, 그리움이란 결핍이 아니었다. 그 것은 어떤  절정,  하나의 엑스터시였다.
연인의 손길인 듯  볼을 스치는 바람조차 부드러워  낮에 읽었던 인디안 추장의 말이 떠올랐다.
 “바람은 삶의 최초에 첫 숨을 주고 그 마지막 숨을 거두어간다”
아!
 흙으로 사람을 빚어 코에 생기(바람)를 불어 넣으셨다는 창조의 시원이 여기에도 있었다. 어쩌면 목숨은 물과 바람의 정령이다. 사랑의 감정이 혈관에 실리면 바람이 분다. 바람의 에너지가 핏속을 따라 돌기 시작하여 누구도 그 열정을 제어 할 수가 없다. 사랑은 인간을 흔드는 바람인 것이다. 바람의 위력 앞엔 대책이 없다.
 모든 존재가 바람의 통로가 되어 들숨과 날숨을 쉬는 동안이 생인 것을. 방금 네 심장을 돌아 나온 바람이 이제 내 허파 속으로 지나가고 있음을 보라.
그 것은 새와 들짐승과 나무들의 몸을 거쳐 다시 네게로 가고 내게로도 온다.
 온갖 생명은 바람으로 하여 하나 됨이 아닌가!  같은 재질로 빚어진 서로 다른 형상일 뿐.
 먼 이국의 하늘 아래 누워서 가슴이 탁 트이고 있었다. 


                         공옥자-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