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저 얻은 행복
비 온 뒤에 태양이 빛날 때도 조그만 행복을 느끼는 것이 사람이다.
요즘처럼 가뭄이 극심할 때는 소나기라도 쏟아졌으면 하고 하늘을 본다.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살아가는 일이다. 생활에서 부족함이 없이 만족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는 상태가 행복이다.
행복은 크게 주관적이다. 같은 상황에서도 늘 행복을 느끼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사람도 있다.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행복의 끈을 오래 잡아두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매일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행복한 마음을 좀 먹고 있다. 가끔씩 편안했던 옛날을 돌아보게 되는 대목이다.
집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제주혁신도시 공사가 한창이다.
34만 8천 평의 광활한 대지 위에 아홉 개 정부기관이 들어선다. 앞으로 3년 정도 더 있어야 완공이 되겠지만, 간선도로 등 기반공사가 진척을 보이고 있다.
혁신도시의 도로가 거의 완공됨으로서 조그만 행복감에 젖어 산다.
불의의 교통사고 이후 건강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 열심히 운동하는 일만 남았다. 걷기운동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혁신도시 내의 길로 나타났다.
혁신도시 내에 아버지가 물려주셨던 과수원이 수용되었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경계인 밭담이 전부 치워져서 기반정비가 되고 공사현장 주변엔 가림 막으로 막혀 있으니, 옛 정취는 찾아볼 수 없다.
지금은 오르막인 동산이 거의 깎여서 흔적이 없지만, 내겐 지금도 유리왓동산이 선연하다.
집과 혁신도시 입구의 중간쯤에 있었다.
시내버스가 없던 시절에 일주도로를 지나는 시외버스를 타고 정류장에서 내리면 6백 미터 정도를 올라와야 마을 초입인 유리왓동산이 있었다. 계속 오르막이어서 숨이 차고 쉬어가게 마련이었다. 통물에서 빨래를 하고 가던 아낙들도, 어촌 마을인 법환리에서 자리돔 장사를 하기 위해 구덕을 지고 올라오던 할머니들도 일단 쉬어가는 장소였다.
내게는 유리왓동산이 아주 특별하게 다가온다. 농고를 나와 3년씩이나 독학 재수를 했던 시절, 속으로 수없이 울음을 삼켰던 장소였다. 공부를 하다가 풀리지 않았을 때도, 그냥 답답할 때도 유리왓동산에 나가 혼자 삭였다. 지금도 카페의 닉네임을 ‘유리왓’이라 정한 이유다.
중학교 때 까지는 여름방학만 되면 앞바다의 해안에서 살다시피 했다. 길이가 1미터 남짓의 낚싯대로 구멍 낚시를 하는 재미로 해서였다.
어느 날은 동네 후배와 낚시를 위해 유리왓동산에서 조금 걸어 내려갔을 때 의외의 안전사고를 냈다.
먹지 않는 고기를 낚았을 때는 낚싯대를 이렇게 제치면 된다고 시범을 보인 것이 후배의 머리에 낚시 바늘이 박힌 것이다. 어린 마음에 몹시 당황했다. 집으로 데려와서 낫으로 낚싯줄을 끊고 마을 의사에게로 갔다.
특유의 너털웃음으로 웃기 좋아했던 의사는 “어디 가서 이렇게 큰 고기를 낚았느냐?”며 웃었다. 낚시 바늘이 깊이 박히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무척 창피함을 느꼈다.
옛날 어떤 나라에 미치광이 샘이란 이름의 우물이 있었다. 그 우물물을 마신 사람들 중에서 미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오로지 임금만이 다른 우물을 파서 마셨기에 홀로 미치지 않았다. 그러자 그 나라 사람들이 되레 임금이 미쳤다며 모두들 임금을 붙잡고 병을 고치려 하였다. 뜸을 뜨고 침을 놓고 약을 들이대자 고통을 견디지 못한 임금은 미치광이 샘으로 달려가 물을 떠 마시고 함께 미쳐버렸다. 그러니 나라 사람들이 왁자하게 모두 좋아하였다.
중국 역사책에 등장하는 미치광이 나라 얘기다.
서귀포시는 아직도 시내 중심을 제외하곤 감귤농사가 생업인 농촌이다. 아침저녁으로 바쁘게 사람들이 오간다. 어디서든 운동을 하는 것이 나쁘기까지야 하랴마는, 농촌에선 농부가 되어야 어울린다. 흙을 손에 묻히는 사람들의 세계에선 그렇게 하는 것이 보기에 좋다.
이제 농부의 세계에서 벗어나 자영업을 하는 나로서는 마을 안길을 걸어서 운동하기에도 그렇다. 아직은 다친 팔이 다 낫지 않았으니 운전이 불가하고, 적당한 곳으로 이동해서 운동을 할 수도 없다. 이제 그럴 염려가 전혀 없어졌다.
혁신도시의 길로 들어서면 앞으로는 바다와 범섬, 문섬이 보이고, 뒤로는 마을 뒷산인 고근산과 맑은 날에는 아스라이 한라산도 보인다.
이보다 더 좋은 걷기 코스가 어디에 있겠는가. 간선도로의 포장이 거의 돼 있고, 인도도 시원히 설치돼 있다. 아직은 왕복 한 시간 코스를 정해 놓고 걷지만, 길이 사통팔달이어서 두세 시간 코스도 만들 수 있다.
요즘 걷기 운동을 하면서 많이 행복하다.
천천히 걸으면서 사색도 하고, 글 한 줄을 구상할 때도 있다. 투자한 것 하나도 없이 이만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음은 저절로 굴러 들어온 행운이다.
운동을 끝내고 집에 와서 샤워를 하는 기분은 또 어떠한가. 거저 얻은 행복을 오래 지킬 일이다.
오태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