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

2012-11-12     제주매일

제주시내에서 신제주 오일시장으로 가는 길 남측에 미완성 건물이 수년째 방치된 채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미완성건물 방치가 이것뿐이 아니다.

제2횡단도로 등 제주시 외각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단장은커녕 사회의 흉물이 되고 있는 느낌이다.  분명 건축주가 부도 등으로 실패한 결과다. 비 오는 날 그곳들을 지나게 되면 괜스레 아픔이 내게로 떠밀려 오는 것 같다. 공사중단 건물은 가릴 것을 숨겨지지 않은 채 천연덕스럽게 휘청대며 걷는 인생말로처럼 여겨지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미완성의 것은 태생의 아픔을 짐작하게 한다. 아픔은 온전한 의식의 것이 아니다.

헌데 미완성의 것으로서도 완성의 것을 넘어서는 것들이 때론  있다. 분명 밑그림 정도에 불과한 것인데 완성의 조화를 능가한다. 아니 그 정도로서가 오히려 더 온전한 것인지도 모른다. 더 그려 넣어 조잡을 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도 되며, 사유가 깊다는 것으로 설명되어지는 것 같기도 한다. 미완성이라는 것이 난감한 실체로 허공중에 고뇌의 눈빛으로 매달려 있는 느낌일 수도 있다.

그런 느낌이 내 가슴에 박히듯 다가온 것은 몇 일전 KCTV방송 교양 채널에서 “고대예술의 기행”이라는 미술교양 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 미완성이 아름다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 프로에서 전시되는 여럿 작품들 중 유독 나의 시선을 끈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성 제롤라모’ 그림이었다.
애원을 하듯 최후의 눈빛을 발하는 바싹 마른 벌거벗은 노인을 사자가 놀랍다는 듯 쳐다보는 그림이었다. 유독 미완성 작품이 많다는 다빈치의 고뇌가 그 그림 속에 고스란히 비추어지는 듯 느껴진다는 해설가의 설명이다.

파리 르부르 박물관에 있는 ‘동정녀와 아기 예수 그리고 성 앤’ 그림 또한 9년이 넘도록 그렸다는 데 배경이 빈 상태라는 말이다. 모나리자의 눈썹은 미완성인가 아니면 일부러 놔둔 것인가. 그는 왜 그림의 완성을 미루었던 것일까?  하며  해설자의 말이 이어진다. 유형의 미완은 유형으로서만이 아닌 무형의 폐허를 갖고도 있다. 르네상스라는 인류역사상 가장활기에 찬 세기적 천재인 그(다빈치)는 실증적 경험과 냉철한 관찰기법을 활용한 것으로서도 유명하다는 해설가의 설명이다.

실제 그가 그려낸 인물됨은 단순하면서도 뚜렷한 개성의 감각적 미를 갖추고 있으며 각도에 따라 달리보이는 착각을 일으키는 입체적 교감을 낳게 된다는 것이다. 원근 적 기법으로서의 실체성과 배경과 주제와의 구분을 모순되지 않도록 착안하는데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녹녹하다는 해설을 더 붙인다. 

또 요즘은 ‘다빈치코드’ 란 것이 현대 미술의 트렌트라고 한다.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의 그러한 심리적 갈등이나 심미적 의식의 것에 기인하여 착안한 창작의 가치물이 아니겠는가 싶다. 이렇듯 깊은 사유 속에 피어난 고뇌에 찬 미완성 작품은 후대에 이르러 명품으로서 평가될 뿐 아니라가치 창출로서도 무한함을 나타내는 작품을 예술창작에서 우리들은 너무나 많이 봐왔다.

하지만 대개 삶의 미완성은 그러하지 않다. 갖추지 못하거나 이루어지지 않은 참혹함을 혹독하게 견뎌야 한다. 이 세상은 실패가 미완을 의미한다. 결혼에 실패한 사람, 사업에 실패한 사람. 실패한 삶은 질시가 붙어 흡사 숨을 조이는 형국이다. 미완성의 조건으로 산다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앙상한 뼈대를 드러낸 도심의 미완성 건축흉물처럼 미완의 것은 조롱받기 쉬우며 상처 받기도 쉽다. 주변에 상처 입은 미완의 느낌이 한둘이 아니지 않은가. 나 역시도 완성이라는 것에 무척 애착하는 편이다.

오름을 오를 때도 꼭 정상에 다다라야만 만족 하듯 글에서도 완성의 것에 집착하곤 한다. 그리하여 쓰다 살펴보면 만족을 하지 못하고 만다. 끝을 내려다가도 끝을 보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끝을 냈다고 마침표를 찍고는 덮어둔다.

그리고는 또 여전히 미완이라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다가 다행스럽게도 착상이 떠오르면 부랴부랴 뜯어고쳐도 보는 것인데 그것이 또 시간이 흐르면 그것이 또 아니라서 답답하다. 어느 면 완성이란 절대적 존엄한 신의 느낌이 따르는 의식이 아닐까. 문득 완벽주의자라야 미완성의 작품을 남겼다하고 완벽하지 않아 완성을 추구한다하는 말이 같은 여운으로 다가온다.

이는 아무리해도 미완의 존재가 있는 것은 인간이란 전제를 당연시 해주는 말 같기도 하다. 그 유명한 천재조차도 미완의 것을 줄줄이 남기는 것인데 나 같은 범인들이 감히 무엇을 완성을 했노라 할 것인가. 알듯하다가 모를 것 같은 느낌의 신미와 사유의 안온함과 완성으로서 얻을 상실감 중 나 같이 좀 부족한 사람은 필시  추한 미완성의 것으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늘 미완으로서 종결을 짓지 못하고 어딘가를 향하고도 있으며 아쉬움을 늘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이 보다 더 자연스러운 삶의 것이 아닐지 모르겠다.

한 때 이진관 가수가 불러대던 유행가 가사 떠오른다.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마는 편지, 그래도 우리는 곱게 써가야 해.”오늘도 또 미완의 글을 마치자니 그 노래가 위안인 양 정겹게 다가선다.

수필가 김찬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