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장굴의 변신

2012-07-24     제주매일

내가 알고 있던 사람은 한라산에 미친 사람이었다. 제주 세계 자연 유산에 등재된 만장굴에도 미친 사람이었다. 일년에 반년은 한라산을 휘졌고 새로운 식물을 발견하면 학계에 보고 했다. 또나머지 반년은 만장굴에 살았다. 이미 고인이 된 고 부종휴 선생님을 말함이다.

어쩌면 돌아가신 분에게 누를 끼치지나 않을지 미안함도 있지만 기왕 작심 했으니 그 빛났던 젊은 시절로 돌아 가본다. 필자는 이 분과의 인연은 1971년 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당시 공안직 에서 문화 담당 때였다. 신변에 어떤 억울함이 있었던지 어느 겨울날 40세 조금 넘은 남자가 필자를 찾아왔다. 그 말씀은 한라산에 자라나는 구상 나무를 마구 캐어 육지로 보내는 사람을 단속해달라는 내용이였다. 초면이지만  몸은 외소했고 얼굴은 까무잡잡했다.
가냘픈 얼굴에 어울리는 돋보기 사이에 눈은 정말 맑았다.

이 분은 바로 1946년 최초로 만장굴 발굴로 세상에 알려진 사람이다. 당시 나라는 어지러웠다. 제주 4.3 사건이 발생 되어 제주도는 초토화 되었고 이후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 되면서 10여 년간 만장굴은 잊혀진 동굴이 되었다.

그 이후 1960년 초 중앙 일간지에 대서 특필 되면서 적국 일반인이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 분은 어느날 기발한 탁상을 냈다. 바로 사랑하는 여인과 동굴에서 결혼식을 올림으로써 동굴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전국 메스컴이 전파되면서 국내는 물론 세계 동굴학자와 그리고 지질 학자들이 닫힌 가슴을 열리게 되었다. 그후부터 만장굴에 대한 본격 조사가 착수되었고 1967년 초부터 일반인에게 만장굴을 공개 하게 되었다.

나는 만장굴 입구에서 주마등 처럼 떠오르는 66년전 그 분의 짚신을 신고 제자들과 동굴을 답사 하면서 5년전 세계 제주 유네스코에 의해 자연 유산으로 등재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다. 자연은 4계절에 따라 여러 모양의 변신을 하지만 석회 동굴 이외에 용암 동굴은 천년 만년 동안 미지형으로 변형이 없다는 것이다.

관광을 하시는 분들은 어디를  가든 잘 닦아진 포장도로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어쩌다 바닥을 걷다보면 울퉁불퉁한 곳도 여러곳 있다. 그러다 보면 앞을 내다보고 가다 보면 동굴 천장이 오묘한 현상을 볼수가 없다, 2년전 여름으로 기억한다. 앞서 서두에 이야기 했지만 조명이 전보다는 많이 밝아 졌다는 것이다. 계단을 지나 입구 천장. 거북바위 동굴인 종착역인 석주등 천연색 칼라 조명으로 관광객의 탄성을 자아내고 있다. 굴속만 화려 한것은 아니다.

6월초에 개관된 홍보관이다. 약 50평쯤 되지만 아기자기 잘 꾸며 있다. 들어가는 순서로 거문오름. 김녕굴. 용천동굴. 당처물 동굴이 가지를 뻗어간 만장굴은 그 역시 으뜸이다. 그 다음 용암유선, 규암편, 거북바위, 용암 발가락 등 눈에 확 들어온다. 홍보관 마지막 영상에서 형님을 보았다. 옛날 같이 마른 몸집 바위터에 걸터 앉은 고 부종휴 선생님이다. 간단한 약력 그리고 꼬마 탐험대 표시가 있었다. 가지고 간 소주를 들며 좋아했던 바위고개를 중얼 거렸다. 유수같은 세월이 지난 지금 노인. 임산부. 아동 역시 만장굴을 돌아보는데 힘이 들때에는 홍보관을 관람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만장굴은 제주의 심장이다. 그리고 심장이 터져버린 역사가 바로 만장굴이다. 2000년 8월31일 제주 모 신문사에서 동굴속 퍼져나간 통일의 노래가 우리들의 가슴을 떨리게 했다. 도민과 이산가족. 관광객 500여명이 용암 발가락 넓은 광장에서 태너 최 영섭님께서 한 오백년. 오돌또기 그리운 금강산등 15곡을 연주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예술이 어울린 마당이 였다. 당시 우리 무두 눈물을 흘리며 통일을 기원 했던 음악회가 다시 기쁨이 눈물을 흘려야 할 기회가 다가오고 있다. 바로 9월에 열리는 WCC 총회에 국내외 관광객을 위해 동굴 음악회를 열렸으면 하는 바램이다.

제주시 산림조합이사 송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