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박할 때는 뛰어야 견딘다

2012-07-15     제주매일

며칠 전에 케이블TV에서 “다큐멘터리 소몰이” 축제를 우연히 시청하게 되었다. 스페인에서 매년 7월 6일에 열리는  소몰이 축제다.  이 흥미로운 축제를 보기 위해 100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왔다고 한다. 이 소몰이 경기는 아침 8시에 경기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한번 울리고, 그 후 6마리의 소가 스페인의 도시 팜플로나의 거리로 입장했다는 것을 알리는 두 번째 총성이 울리며, 경기의 끝을 알리는 세 번째 총성이 울리기 전까지 소를 피해 좁은 골목 사이를 정신없이 뛰어다는 시민들과 관광객들의 아우성을 치는 장면은 지금도 나의 머리에 저장되어 있다.

밤새 팜플로나의 길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축제 기간에는 노숙을 허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산 페르민(Sanfermin) 축제 기간 중 가장 마지막 날 밤이 되면 메인 광장은 촛불로 가득 차며 사람들은 바스크 지방의 토속민요를 부르며 축제는 끝이 없이 계속 된다. TV로 보는 나도 오버랩  되어 내가 소를 피해 달리는 기분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축제는 이런 것일 것이다.

우리는 축제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제주시 정월대보름들불 축제서부터  육지부의 각종페스티벌, 국제매직페스티벌 등 테마축제에 이르기까지 문화행사에 쉽게 축제 혹은 페스티벌을 붙인다. 올림픽이나 월드컵과 같은 스포츠도 인류가 함께 즐기는 대축제라고 한다.

이 축제해설에 의하면 이 소몰이 축제는 1924년 이래 15명이 죽고 200명이 부상당했다는 설명이다. 위험천만한 축제인 것은 사실이다. 편집자의 설명을 빌리면, 이미 중세 때부터 있어온 축제지만 이 축제가 전 세계적인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첫 작품인 <태양은 다시 뜬다. 1926년>에 이 축제를 소개한 덕분이라는 것이다.  우리 집 마루에 걸인 평면 벽 거리 TV 화면에는 “옆구리가 진흙투성인 육중한 황소들이 뿔을 휘두르며  인파속으로 뛰어들어 질주”하는 장면은 나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소와 같이 달리며 아우성치는  사람들 중에  다치고 죽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았다.

정말 위태위태한 장면들이다. 그런데 소들이야 흥분해서 달린다지만,  도대체 무엇이 사람들을 이토록 목숨을 내놓고  질주하게 하는 걸까? 단지 재미로? 아니면 심심해서?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을 감수하면서까지 달리는 이유는 또 다른 무엇이 있을 것이다. 꿈을 이루지 못한 ‘한’ 때문에? 아니면 세사의 어려운 현실을 탈출하기 위해서? 등등 각기 원인은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저마다 어린 시절에 질주 했던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들의 소싯적 질주는 무엇인가로 부터 탈출하고 해방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담배를 끊은 한 친구의 말이다. 담배를 피우고 싶을 때는 무조건 밖에 나가서 뛰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담배피고 싶은 절박한 마음 견디기를 1주 이상 한 후에야 담배를 멀리 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이 친구도 담배를 끊기 위한 몸부림이다. 

오래전에 읽은 소설<잘 가요, 엄마 김주영 저, 문학동네> 중에 기억나는 대목이다. “ 나는 무작정 뛰기 시작 했다. 무지개를 잡으려는 아이처럼 나는 한길을 벗어나 논둑, 밭둑길을 가릴 것 없이 뛰고 또 뛰었다. 몸이 뜨거워지고 숨이 목젖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나는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 … 나는 그다음부터는 울고 싶을 땐 무작정 달렸다. 달리고 나면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소설의 어린주인공은 엄마가 개가(改嫁)하는 현실 앞에 몸부림치며 그 악몽 같은 현실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어린동심은 너무나 현실이 기가 막혀 마음의 질주를 한 것이리라.  우리들은 삶의 답답하고  안타까울 때 달면서 견딜 때가 분명히 있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본래 야생에서 다른 짐승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혹은 적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질주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더 이상 육체로 뛰지 않게 되자 오토바이, 자동차, 배, 비행기 등 다른 탈출기를 이용해 자기 안의 질주 본능을 대리 충족시키고 있는 지도 모른다.  사업의 망하거나 가족과 유명을 달리하면 우리들은 멀리 여행을 가서 마음을 추스르고 돌아온다. 그러나 이것은 간접 질주다. 자신의 몸뚱어리로 혼신의 힘을 다해 질주하는 것이라야 진짜 질주다. 죽을힘을 다해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해서 뛰어야 억장이 무너지는 삶의 한을 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네 둑길을 질주하든, 끝없이 펼쳐진 초원을 질주하든, 성난 소의 날카로운 뿔 앞에서 “걸음아 나살려라”하며 질주하든 이 모두가 진한 삶의 몸부림이 아닌가! 결국 모든 질주는 살기 위한 몸부림 그 자체다.

그리고 여기서 멈출 수 없다는 자기 안의 아우성이 스스로를 다시 질주하게 만드는 것이리라.  요즘 우리들이 잘 질주를 하지 않는 것은 몸이 둔해진 까닭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럴 마음이 없어진 때문일 수 있다. 아니 삶의 가수면(假睡眠) 상태에 빠진 탓이라고 해야 옳을지 모른다.

오랜 옛 도시의 좁은 골목길을 성난 황소와 함께 목숨을 걸고 질주하는 이들을 보며 우리들도 가끔 그런 광기 어린 소몰이 질주를 통해서라도 가수면 상태로 잠든 자신의 삶을 흔들어 깨웠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소몰이 축제를 보고 느끼는 소감이다.

수필가 김찬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