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정원(庭園), 마음정원(庭園)
2011-10-30 김찬집
서정주 시인의 노래한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는 시심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은 태어나서 일을 하며 무엇인가 만들거나 기르고 가꾸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없는 존재인가 보다. 그렇기 때문인지 나는 요즘 빈 시간만 있으면 쉬지 않고 정원을 가꾸는 일에 정성을 쏟고 거기에서 큰 즐거움을 찾는다.
이러한 나의 몸부림은 내가 숨을 쉬는 공간이 너무나 황폐해져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나의 삶을 가꾸는 일에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에 온 결과 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다.
성서에 의하면 태초에 하느님 자신이 에덴의 동쪽에 나무와 꽃을 심어 동산을 만드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곁에는 항상‘정원이 있고, 솟구치는 샘이 있었다는 바이블의 기록이다.
그 까닭이야 무엇이든 간에, 나는 정원에서 일하는 가운데서 많은 삶의 진실과 경의를 새롭게 발견하곤 한다. 우선 정원을 가꾸는 일은 죽음의 흙빛으로 검었던 나의 시야를 푸르고 싱싱한 생명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게 마음정원이다. 살아 있는 것이 죽음보다 얼마나 아름다우며 소중한 것인가를 다시금 확인하게 해 준다.
골갱이를 들고 검질을 매거나 나무와 꽃에 물을 주는 순간은 아무 잡념 없이 무아(無我)의 경지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정원에 심은 나무와 씨앗이 뿌리를 내려 새싹을 돋아나게 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뜨거운 태양아래 여름을 보내고, 가을에 열매를 맺은 후 추운 겨울의 눈 속에서 말없이 봄을 기다리는 모습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묻혀 오랜 시간을 보낸 후 꽃을 피우는 작업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신의 섭리기도 하지만, 가지들을 온통 잘린 채 심어진 고목나무가 한 마디 신음 소리도 없이 땅 밑에서부터 물을 힘차게 빨아 올려 푸른 잎을 움트게 하는 모습은 정말 나를 숙연하게 한다.
정원은 언제나 내가 일한 만큼 그 결과를 가져 다 준다.나무의 생명력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가물 때 부지런히 물을 주지 않으면 무성하게 자라지 못하고, 검질을 매어주지 않으면 꽃나무가 있어도 찬란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 않는다. 어떤 나무나 식물은 토양의 성격과 질, 그리고 그것이 심어져 있는 위치에 따라 빛을 발하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몇 년 전에는 한라산에만 자생하는 시러미 나무 분재를 꽃집에서 사와서 흙에 심었다. 몇 개월 자라다가 죽어 버렸다. 산에서와는 달리 공기가 잘 통하지 않는 도시 가정집에 심어두면 잘 자라지 못하고 쉽게 죽는 경우가 많다.
어느 해인가 내가 정원 가꾸기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마음씨 좋은 이웃 집 아주머니가 여름에 모기가 없어진다며 고결해 보이는 청초한 ‘좨피’나무를 가져다 정원의 담장 밑에 심어 주었다. 나는 그 나무의 향기가 좋아서 한해 동안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으나 결국 죽고 말았다. 이듬해 봄이 되어도 그것의 움이 돋아나지 않는 것을 보고, 야생 나무는 일종의 고산(高山)식물에 속하기 때문에 산 아래 위치한 낮은 곳, 우리 집 정원에서는 살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물론 우리 집 마당은 넓은 정원은 아니지만 다른 인력을 빌리지 않고 우리 부부가 가꾸기에 안성 맞은 정원이다, 고목은 아니지만 수려한 소나무와 단풍나무, 비자나무, 석류나무, 동백나무, 팽나무, 종려나무, 감나무 그리고 대나무 등으로 담장 주변에 생 울타리를 만들고 철쭉과 작약과 풍란을 돌에 붙이고 가지각색 일년초와 더불어 심은 후 녹색 잔디를 심은 위 제주현무암으로 자연을 압축했다. 지금은 아주 작은 숲속의 빈터를 이루어 놓았다. 그래서 날씨가 좋으면 아름다운 새들이 날아오고, 수석분에 고여있는 물에 모욕을 하고 날아간다. 봄여름 꽃이 필 때면 벌과 나비들이 찾아온다.
새벽에 잠이 깨어 가꾸어 놓은 정원으로 내려가면, 대기는 싱그러운 풀냄새와 꽃향기, 그리고 나무들이 숨 쉬며 내 뿜는 산소로 뒤범벅을 느낀다. 이 순간 나는 유년 시절에 잃어버렸던 낙원을 되찾은 뜻한 느낌을 갖는다. 나는 신화의 세계에서의 낙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모른다,
그러나 우리 집 보잘것없는 정원과 ‘에덴의 동산’을 비유하는 버릇이 무의식중에 생겨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것은 아마 하느님이 우리를 ‘에덴의 동산’에서 추방하실 때, 우리에게 무엇인가 열심히 가꾸고 일하면 역사의 시간 속에서도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을 수 있다고 말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