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 얼굴, 말(언어)의 위력

2011-10-19     공옥자

말(언어)도 말(馬)처럼 머리도 있고 꼬리도 있다. ‘말 머리가 밉다’거나 ‘말 꼬리 잡지 말라’고 한다. 뼈도 있다. 언중유골(言中有骨)이다.  허리? 있다, ‘말허리 끊지 말라’고 한다. 손? 물론, ‘말솜씨가 좋다. 나쁘다’ 평을 한다. 발은? 없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데야,

생각하자니 말에는 온갖 성품이 다 있다. 대충 예를 들어본다.


온도- 따뜻한 말, 미지근한 말, 차디 찬 말.

명암- 밝거나 어두운 말.

맛-  쓰고, 떫고 맵고 짜고 달고 고소한 말.

촉감- 날카롭고 부드럽고 껄끄럽고 포근한 말

힘- 천량 빚도 갚는 말,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말.

선악- 천사의 말, 악마의 말.

미추- 아름다운 말, 누추한 말.

품격- 고귀한 말, 천박한 말.

거리- 천리만리 정 떨어지는 말, 찰싹 감겨드는 말

형색- 화려한 말, 초라한 말.

표리- 겉과 속이 서로 다른 말.

중량- 천금같이 무거운 말, 새 털 같이 가벼운 말.

말의 사전적 의미는 ‘사상이나 감정을 나타내는 소리’라고 되어 있다. 말은 소리를 통한 의사소통의 수단이다.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숨겨진 사실을 드러내어 의식에 영향을 끼친다. 말의 정의는 단순하지만 말이 사람의 입을 통해 나오는 순간의 정황은 천차만별이라 음성의 강약, 고저, 표정, 몸짓 등이 위와 같은 여러 갈래의 감정과 느낌을 만든다.

 말이 있어 비로소 인간은 추상적 사유가 가능해 졌다. 동물에게는 역사도 미래의 설계도 없다. 말은 절대의 힘으로 인간의 진화를 주도해 왔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말은 입 밖에 나온 후 공기의 진동이 사라지면 끝나지만, 그 여파는 에너지로서 작용한다. 말의 주술성, 기도를 하고 주문을 외우는 것은 말의 힘을 믿는 행위이다.

몇 천 년 전의 말이 시공을 건너 와서 오늘 우리의 삶을 비추고 있으니 말의 위력을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캐나다 북부, 영하 몇 십도의 혹한에 벌목장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말을 하면 말이 공기에 닿자마자 얼어서 땅에 떨어지고, 봄에 얼음이 풀리면 다시 살아나 숲 속이 와글와글 시끄러워진다는 동화가 있다. 이 이야기는 무심코 하는 말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 묻혀 있다 되살아날 수 있다는 경고로도 들린다.

말은 죄가 없을 터지만 의사의 칼과 강도의 칼의 쓰임새가 다르듯이 말은 누가 어떤 목적에 쓰느냐에 따라 평화와 사랑, 축복과 화해를 이루는 약이 되기도, 싸움, 불화, 거짓, 중상의 독이 되기도 한다.

신은 손으로 사람만 빚으셨고 우주는 말로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빛이 있으라.”

“궁창은 물과 뭍으로, 광명은 밤과 낮으로, 바다는 생물로, 공중은 새들로, 땅은 온갖 나무와 짐승과 풀들로 채우고 번성하라.”

 말로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신화는 얼마나 빛나는 은유인가. 장엄한 신의 목소리가 우주에 울려 퍼진 창조의 시원에는 신의 말씀이 있었던 것이다. 말이 우주의 질서와 섭리의 동력이었다. 그러나 그 말이 인간에게 왔을 때 인간은 신에게 반역을 시도했다는 기록을 본다. 바벨탑의 이야기다. 말의 교란은 신의 중형이었다. 그 형벌로 해서 갈래갈래 찢긴 말, 외국어를 익히느라 많은 사람들이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붇고 있는 현실, 아마 멀지 않은 시기에 전자기기가 이 문제를 해결 할 듯도 하지만 그때쯤 다시 어떤 재앙이 도래 할지는 모를 일이다.

말의 기기묘묘한 기능, 그 얼개가 얼마나 복잡하면 언어학이라는 학문이 탄생했겠는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던가. 인간은 말의 집에서 한 발짝도 벗어 날 수 없다고.

말이 단순한 도구인줄 알고 사용하지만 사실은 인간이 말의 지배아래 산다는 것을 생각 해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말이 형상화한 이미지에 갇혀 우리의 사고나 감정이 휘둘린다는   것을, 그렇더라도 우리는 표현 된 말 뒤에 숨은 의도나 속마음을 읽어 내는 힘이 있다. 연꽃을 들어 보인 부처의 뜻을 깨달았던 제자 가섭의 미소가 그러하다. 기업에서도 하이테크   (첨단기술)뿐 아니라 하이터치(인간의 감성)를 중요시하는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미국의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J,Naisbitt)가 소개한 이 말은, <하이터치 리더>라는 개념으로 발전하여 메타 커뮤니케이션의 시대를 열어 가고 있다. 기업 경영의 협상용으로 쓰였지만 인생전반에 통용이 가능하리라 본다. 삶의 지향점은 진정한 소통일 것이므로.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말 한마디에 위로 받으며 한생이 간다. 아무리 세상이 거칠어도 폭행보다는 폭언에 시달리는 사람이 훨씬 많다. 마누라 잔소리가 죽기보다 싫은 남편, 남편의 비난에 진저리치는 아내, 인생의 행불행이 이 하찮은(?)말에 좌우 되고 있다. 말 뒤에 숨은 의도를 읽을 줄 알고 깊이 살펴본 후에 응대하면 말실수를 줄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말이 주는 영향에서 자유롭기가 어렵다. 말을 벗어나려는 끝없는 시도, 묵언 수행이나 침묵의 가치를 강조하지만  말의 권능, 그 제한이나 통제를 벗어 날 길이 묘연하다. 묵언, 침묵, 조차도 말인 것이다.

쉽지만 어려운 말,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듣는가에 한 생애가 흔들린다. 천의 얼굴로 인생을 지배하는 말, 살아 있는 동안은 말의 통치에서 벗어 날 길이 없다. 다만 말이 멈춘 곳에 진리가 있다는 아스라한 길 표지판, 본 듯하다.  말의 안내를 따라가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