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영원한 질서

2011-09-08     김찬집
인간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있다. 삶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심해서 판단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옛날에 새옹이 기르던 말이 오랑캐 땅으로 달아나서 노인이 낙심하였는데, 그 후에 달아났던 말이 준마를 한 필 끌고 와서 그 덕분에 훌륭한 말을 얻게 되었으나 아들이 그 준마를 타다가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으므로 노인이 다시 낙심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아들이 전쟁을 피한 중국의‘인간훈(人間訓)’에 나오는 말이다.
삶에는 현재의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는 모든 예측의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쓴맛과 단맛으로 엉켜 살아가는 가운데에도 누구나 단맛만을  맛보며 살기를 원한다. 하지만 인간은 운명적으로 쓴맛과 단맛을 함께 맛보며 나름대로 성장되면서 살아가게 마련이다.
이 같은 되풀이되는 쓴맛과 단맛의 교차 질서와는 달리, 요새와 같    은 교통의 폭주시대에서는 난데없는 교통사고로 죽거나 불구자가 되는 경우도 있고 심하면 가족이 몰살되는 큰 불상사를 만나게 됨을 종종 보게 된다. 이런 대형의 비극을 과연 우리들의 삶에서 어떻게 넘겨야 하느냐는 어떤 철학이나 종교로도 답이 없다. 
인간이 애초에 종교를 지니게 된 데는 그와 같은 불상사를 방지 하    고 불가항력적인 막막한 운명 앞에서 신에게 의지하기 위한 것이라 하지만, 예기치 않은 끔찍스런 불행은 종교를 지니고 있건 없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가능의 공간이다. 근래에 나의 주변에서도 참사와 슬픔 또는 행·불행을 자주 접하면서 살고 있다. 이게 우리들 삶의 영원한 질서다.
그러나 삶의 질서는 가족, 친족, 친지들을 대상으로 어느 쪽은 비극적인 일을 닥치고 어떤 쪽은 로또복권 당첨, 시험합격 등 큰 경사를 접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한 시점에서만 보면 길흉사가 갈라지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영원한 삶의 질서로 보면 길흉사가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삶의 주기에 불과 한 것이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행과 불행이 엇갈리는 가운데 성장되고 늙고 병들어 죽어야만 하는 무상의 동물이지만, 순간에 교통사고로 식구들이 몰살된다든가,
아니면 단 한 번에 로또 당첨으로 일확천금이 생긴다든가, 하는 것은 그리 흔치 않은 드문 사건들이지만 우리들의 삶에 나타나는 일들이다. 말하자면 이런 것들은 종교적 기도나 혹은 당한 당사자들의 적선과 적악과는 전연 무관한 누구에게나 예기치 않게 당할 수 있는 가능의 공간이다. 이런 불가사의한 운명의 기로에서 흔들이며 절규하는 것이 삶일 수 있다.
그러나 운명은 아무도 모른다는 불가지론과는 달리 인생의 순간순간은 모른다 할지라도 인생의 시간과 폭을 크게 보면,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속담과 같이 환경과 조건에 따라 대충은 파악될 수 있지 않을까? 즉, 춘하추동의 시간적 추이에 따라 따뜻한 봄이 지나면 무더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서늘한 가을이 오고, 가을이 지나면 추운 겨울이 오는 것과 같이 순차적으로 질서 있게 사계절은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변칙이 있다면 따뜻하고 덥고 서늘하고 추운 기후의 이행이 질서정연하게 되풀이되는 가운데에도 간혹 따뜻함과 무더움, 서늘함과 추움이 좀 길게 혹은 짧게 혹은 강하게 혹은 약하게 혹은 드물게 변칙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지만, 여름이 될 때 겨울이 온다든가, 가을이 올 때 봄이 온다는 변칙은 있을 수가 없다. 인간도 그런 테두리를 벗어날 수가 없다.
유년기를 지나면 소년기가 오고, 소년기가 지나면 순차적으로 청년기·장년기·노년기가 누구에게나 이행되지만, 유년기에서 청년기를 건너 뛰어 장년기가 된다든가 하는 변칙은 전연 상상할 수가 없다. 다만 사람의 체질과 환경에 따라 나이에 비해 더 젊고 더 늙고 변칙은 있을 수가 있다. 우리의 최대 관심사인 인간의 건강 및 수명은 신앙적 결단에 의해 좌우되기보다는 본인의 관심과 생존환경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만은 사실(fact)이다. 그러므로 종교의 근본정신은 인간의 길흉화복에 예속시키기보다는 최상의 인생 문제인 윤리에 연관시키는 것이 오늘날 고도한 과학 문명의 시대에 맞는 것은 아닐까?
즉, 유교에서 말하는 선을 쌓는 사람은 반드시 넘치는 경사가 따르고, 악을 저지른 사람은 필히 재앙이 내린다는 ‘선복악화(善福惡禍)’를 최대의 윤리강령으로 삼는 것도, 불교에서 ‘인과응보(因果應報)를 강령으로 삼는 것도, 기독교에서‘심은 대로 거두리라’는 바이블(bible)의 경구도 삶의 윤리에 더 가깝고 실질적인 삶에는 한계가 있다. 희극과 비극, 행복과 불행은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누구에게나 부닥치는 필연적 사이클이지, 종교적 내지 기복적 기도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희극이 있으면 비극이 따라야 하고, 행복을 맛보려면 불행을 통하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누구나 행·불행의 수레바퀴의 틀에서 ‘영원한 것(eternity)’에 대하여 불타는 정열로 삶을 살 때 우리들에게 닥치는 희비극종착역은 극복뿐이다. 이 극복은 우주의 시간과 공간의 질서에 의하여 태양의 궤도를 도는 한 삶의 영원한 질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