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2011-08-15     김 찬 집

 
내가 요즘에 대화를 하면서 제일 흔하게 쓰는 말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다. 오늘 신문을 보는데 ‘결혼을 원하는 올드미스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혼 율은 덩달아 뛰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읽었다. 생각해보니 나의 조카 벌 되는 미스들도 외모, 실력(학력), 직장 등 뭐하나 빠진 게 없는데도 아직도 30대 후반 미혼이다.
고학력, 고소득 전문직 올드미스들이 왜 결혼을 안 하는지에 대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써서 설명을 해도 설명을 듣는 사람이나 신문기사를 읽는 사람들은 이분법 적으로 간단명로하게 결혼안하는 이유를 말하면 좋은 설명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여성들이 콧대가 높아서, 아니면 육아, 가정 살림이 싫어 서로 이분법적 설명하면 명쾌한 설명이 된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식으로 설명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삶은 ‘이것 아니면 저것’ ‘이것은 옳고 저것은 틀렸다’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로 풀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될까? 모든 인과관계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쁜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것일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삶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는 것같이 삶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같이 명암이 동행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물체에 그림자가 없다면 그 물체는 존재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이것은 옳고 저것은 틀렸다는 식의 이분법 사고와 해석을 선호하며 명쾌하고 이분적인 말을 정의롭다고 착각하며 절충하는 자를 양비론 자 또는 기회주의자로 매도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이분법만을 선호하다가는 인간사회도 인간 역사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은 자명하다. 우리들의 실제역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점철되어 있음은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고 이승만 전 대통령,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분명히 독재를 했고, 일 부 사람들의 그의 치하에서 고통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했고 경제발전을 이룩하는 등 우리나라에 대단히 큰 공헌을 한 역대대통령이다.
그리고 고 전 노무현 대통령도 세계10위권 경제대국의 대통령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경륜과 안목을 갖추지 못했다는 일부 비판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신분의 기득권을 깨뜨리고 민주화기반을 다지고 가진 게 없는 서민들도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는데 성공 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논쟁을 계속하는 친일파 문제를 놓고 봐도 마찬가지다. 애국계몽운동을 이끌고 한국 문단과과 우리문화와 우리나라독립에 선구자적 역할을 한 많은 문인들도 일제에 협력한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그들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헌신한 분들이다.
이와는 반대의‘그럼에도 불구하고’는 해방직후 좌파지식인들이다. 해방된 조국에 인민중심의 낙원을 실현하겠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들의 만들어 낸 것은 인민의 굶어 죽는 오늘의 동토공화국인 북한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인간사회의 복잡성과 복합성을 설명하는 데 불가결한 언어다. 특히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공존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의 사용을 권하고 싶은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리고 우리사회의 분열은 많은 부분의 내용적으로 이념이 아니라 가족사와 연관 된다는 특징을 보인다.
우리나라의 분단과 6.25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시대의 폭력은 많은 젊은이들의 삶을 유린한 것도 사실이다. 과거 군사정권시절 우리나라 전통성을 완강히 부정하는 인사들 가운데 적지 않는 사람들이 투명치 못한 법집행에 의해 고통과 상처를 당한 아픈 가족사를 가지고 있다. 이 아픔을 당한 사람들이 분열은 여전한 것이다.
그러나 매사에 시(是)가 있으면 비(非)가 있는 법이며, 모든 인간은 삶의 복잡다단한 과정에서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주의적 양비론(兩非論)이 아니라 시(是)와 비(非)를 함께 보고 사안을 파악하려는 안목이 정녕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더 많이 사용할수록 이제껏 보지 못한 측면이 드러나게 되고 타인에 대한 이해와 관용도 깊어 질 것이다. 이제 제발 증오와 복수를 대물림하는 이분법적 사고(思考)만은 멈추는 사회 문화가 필요하다.
모두에서 말한 “결혼을 원하는 올드미스들이 많은데도 미혼 율이 높다”는 말을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대입하면, 올드미스들은 이제 경제적 안정을 갖췄다. 따라서 본인들은 보다 나은 결혼을 통해서 자신의 지위를 끌어 올리는 소위‘양혼(良婚)’할 필요가 적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여전히 많은 전문직올드미스들은 ‘양혼’을 원한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올드미스들의 높아진 눈높이에 맞출 수 있는 남자를 찾기라 더욱 어려워진 것이다.
여성들의 눈높이가 높아 졌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남자들도 배우자를 택할 때 자기보다 잘난 여자와 만나는 걸 피하는 경우가 많아 결혼율이 저조한 것이다. 풀어쓰는 언어와 감동적인 언어에 대한 선호도를 한번쯤 짚어보는 것도 우리들의 몫이다.

수필가 김 찬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