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라, 봉기하라”
현실에 관심을 가지면 세상에 만연한 불의가 보인다. 그런 불의에 분노하고 그것을 바꾸려 할 때 세상은 바뀐다. 불의에 대한 분노야말로 인간의 외침이고, 인간의 요구 아닌가?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가 요즘 독서계의 화제다. 나치 독일 당시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던, 올해 94세의 역전의 용사가 쓴 얇은 팸플릿. 프랑스에서 출간 후 200만 부 이상 팔렸다. 한국어로 번역되어 지금 우리 곁에서 같은 구호를 외치고 있다. "분노하라! 봉기하라!"고.
한국 사회는 어떤가? 한국은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학창시절, 사회 시간에 자본주의에 대해서 배운 적이 있는가?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왜 학교에서는 그것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는가? 또 제주 사회는 어떤가? 제주특별자치도 재정위기는 악화일로에 있는데 해결대책은 감감이다. 갈수록 악화되는 제주도의 빚에 대한 우려는 아무데도 없다.
우리는 프랑스 사회보다 더 많이 분노해야 하는데도, 아무도 분노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처한 참담한 현실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우리가 목도하는 끔찍한 빈익빈 부익부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존엄한 존재다. 인간의 존엄성은 어떻게 확인이 되는가? 바로 자신의 몸이 놓이는 자리에 따라서 그 존엄성이 확인된다.
에셀은 나치로부터 레지스탕스가 프랑스를 해방시키던 그때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찾기 바란다." 그 분노를 가로막는 장애물인 무관심을 떨쳐내며, 그것을 팔레스타인의 평화주의자들처럼 비폭력이라는 더 나은 수단을 통해 표현하고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폭력을 통해 세상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고 그것을 바꿔나가야 한다는 것이 에셀의 확실한 입장이다. <분노하라>는 민주주의의 가치와 투표를 통한 참여와 비폭력 투쟁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왜 이토록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을까? 여기에 에셀은 또 이렇게 외친다. "세 단어로 줄이면 여전히 이것입니다. '자유, 평등, 박애!'"
볼테르는 이렇게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열성적인 사람은 누구인가?’ 불테르는 이렇게 답했다. “(세상에서 가장 열성적인 사람은)광신자다. 광신자가 열성을 부리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지혜를 가진 자들이 열의를 보이지 않은 것 역시 수치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우리가 분노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것은 너무나 수치스러운 일이 아닌가?
한국에서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쓴 소설가 조세희가 지난 7월 1일 오랜만에 인권연대 창립기념식에 참석해 역시 “분노하십시오”라고 청중들을 설득하고 나섰다. “분노하십시오. 분노하는 데는 굉장히 힘이 필요합니다. 한국은 지금 다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요즘 눈물겨운 현장 이야기가 우리 가슴을 꽉꽉 누르고 있습니다. 공장에서의 삶이 비인간적이라면 공장이 개조돼야 합니다. 국회에서 제대로 안 되면 국회가 개조돼야 합니다.”라고 젊은이들에게 분노할 것을 주문했다. 폐기종으로 아픈 몸을 이끌고 연단에 오른 그는 “여러분은 독재자에게 저항도 잘 못하고 불복종 항복도 받아내지 못하고 여러분 일자리도 만들지 못한 제3세계 아버지들의 자식”이라며 “아버지 세대의 잘못을 기억하고 냉소주의자가 되지 말고 싸우라”고 말했다.
제주사회에서 분노해야 할 일은 더 많지 않은가? 제주현실의 불의에 분노하고, 그것을 고치고 바꾸기 위한 다양한 저항이 있어야 한다. 단, 그 저항은 구태의연한 방식이 아니라 참여하는 개인의 상상력에 기반을 둔 창조적인 것이어야 한다.
<분노하라>가 2010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잇는 또 다른 신드롬을 낳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