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론과 무신론의 사이

2011-07-25     김찬집
모 중앙일간지에 박스기사(Boxed report)로 실린 내용이다. 인간문화재 무속인 김금화씨 인터뷰 기사다. 그분의 인생 스토리를 읽으면서 많은 것을 공감했다. 자신은 정성과 정성으로 자신을 위해 기도로 살며 신을 믿으며 굿도 국내뿐 아니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미국 등등 ....... 에서도 굿 공연을 해서 많은 신뢰를 받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 한다. 삶에는 “공짜희생 없고, 공짜고생도 없고, 대가는 반듯이 돌아온다.”는 것이다. 자신은 점을 치지만 점을 보러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정말 어려운 고비가 지나면 바로 좋은 일이 시작된다. 고 설명한다. 가장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다는 것은 “머지않아 좋은 일이 온다.”는 증거라고 용기와 마음을 추스려 준다는 것이다.
이분의 말처럼 정말 신은 존재하는가? 몇 년 전에  읽었던 책<만들어진 신, 리처드 도스킨저, 이한음역, 김영사>을 찾아서 대충 또 읽었다. 또 읽으면서 느낀 것은 신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인간의 본성과 가치를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저자는 신이 없음을 주장하면서 오히려 신을 믿음으로써 벌어지는 참혹한 테러와 전쟁, 기아와 빈곤문제를 부각시킨다.
저자는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여러 논증들을 역사적 증거와 과학적 논리로 신의 존재는 잘못된 믿음의 주는 환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저자의 논리 중  몇 부분이 잘 이해가 안 된다. 저자는 인간들이 신의 존재를 믿는 이유로는 인간이 우주의 복잡한 원리를 잘 이해 할 수 없음으로 일종의 절대자가 우주를 설계하였다고 믿고 싶어 하는 것이 신을 믿는 기초라는 것이다. 삶의 곤경에 봉착하면 신의 섭리로 받아드리는 것이 신을 믿는 사람들의 ‘십팔번’ 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저자는 세상창조는 신의 섭리가 아니라 다윈의 진화론을 든다. 하지만 이는 우주의 섭리론 보다 진화론이 더 맞다는 주장일 뿐 신의 부재(不在)논리로는 적합하지 않은 것만 같아서 하는 말이다.
또 저자는 사람들이 과학적인 태도를 가질 것을 촉구하면서 그것이 진정으로 어른스러운 태도라고 했다. 이 말은 사람들의 어린 마음이 신의 존재를 창출했다는 의미다. 사람들이 더 지성과 교양과 지식을 쌓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신은 없다는 말이 된다.
우리세상은 이제까지 신이 “있다 없다”는 결론은 없다. 그리고 이제까지 동서양 철학에서 계속 연구학문일 따름이다.
1901년 미국매사추세츠주에 있던 “말기 결핵환자 요양원”에서 영혼의 존재를 증명하기위한 실험이 있었다. 죽음을 확정하는 의사가 사람은 죽음과동시에 몸무게가 4분3온스가 줄며 이는 영혼이 육체를 떠났기 때문이라는 의사들의 주장을 확인하는 실험이다. 대형 저울위에 간이침대를 설치 한 다음에, 임종을 앞둔 결핵환자를 눕혀놓고 그가 죽는 순간 저울 눈금에 변화가 있는지를 지켜보는 실험이다.
이 실험은 그리 정밀하지도 과학적이지도 않았다고 한다. 여섯 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그 결과가 전부 달랐다는 것이다. 그 실험 말고도 그 요양원에서 영혼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시도가 많았지만 과학적으로 입증에 성공한 사례는 현재까지 없다고 한다.
나의 얇은 생각은 신이 존재 유무는 분명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신의 존재유무가 분명하면 세상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험악한 세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가 분명한 사회가 되면 국가 삶의 모든 가치가 신이 중심이 되는 아찔한  종교사회가 될 수 있으며. 신이 없는 세상이 분명해지면 사회는 더 삭막하고 삶에 탈출구가 없는 숨이 막히는 세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신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있어서도 안 되고 없어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어차피 세상은 살기위해서 자신의 이익을 찾는 것이  삶인데, 신의 존재유무가 이기유혹을 완화또는 촉진 시킨다는 의미다.  그래서 종교는 신의 존재를 믿음으로 사회악을 다스리고 예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윤회(輪?)와 환생(還生)을 믿는 사람들은 “보시(布施)”가 후생(後生)으로 연결된다고 불가에서는 전한다.
사회를 밝히기 위한 불가에는 이런 법어가 있다. 저승에 가면 그 사람이 이승에서 쌓은 업보를 비추어 본다는 업경대(業鏡臺)라는 거울이 있는데, 이 업경대는 그 사람의 이승에서 양심을 보는 ‘법정’이라는 말이다.  이 무의식(無意識)이 밝으면 그 사람의 머리 뒤에 뜨는 아우라(Aura)시원스럽고, 업이 많으면 아우라가 시커멓고 조잡스럽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절간이나 성당에서 성인들을 묘사 할 때 머리 뒤에 둥근 아우라를  시원하게 그려놓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열성적으로 사회에 헌신하고 열성적인 성녀(聖女)로 불렸던 테레사수녀가 고해 신부에게 보낸 40여 통의 편지에서 “(예수님을)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다.”며 신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고통을 호소했다.  그런 번민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신의 소명을 저버리지 않고 사랑과 자비를 실천했기에 테레사 수녀의 이승삶이 더 빛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신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