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는 언제나 정의로운가.

2011-06-20     공 옥 자

 

  인간의 무의식에는 약자 편을 드는 습성이 있는 듯하다. 자비심이 발동하는 것이다. 설사 약자에게 잘못이 있을 경우에도 약자라는 입지에  동정이 가고 손을 들어 주고 싶다. 그 이면에는 강자의 양보나 관용에 기대는 마음이 있다. 
 라디오 시사토론 시간에 체첸 문제를 논의 하다가 약자인 체첸이 강대국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지만  체첸역시 적잖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결론 끝에, 기자는
 “약자는 언제나 정의로운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 섬뜩한 충격을 받았다. 어떤 국가 어떤 단체도 언제나 정의로울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선과 악을 함께 지닌 인간은 때로 선하다가 때로 악해진다. 명쾌하게 선을 긋고 편을 가르는 일이 쉽지 않다.
 년 전 제주신문 칼럼에서 읽었던 <계란과 돌>이란 기사가 생각났다.  계란과 돌이란 단지 힘의 우열이 아니라 <선과 악> <불의와 정의>등을 은유하고 있었다, 어려운 여건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스승들의 예화를 들어 알들의 노력과 성취를 찬양하며 사회는 알처럼 생명력 있는 삶에서 진리가 구현되리라는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소신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나  개인이나 집단이 생애를 관통하여 알이나 돌인 체로 존재하던가. 약자가 강자가 되었다가 강자가 약자로 전락하며 끊임없이 변전한다. 더구나 상대의 불의는 확대 과장하고 자신의 불의는 은폐 축소하려는 인간 본성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공산치하 수백만  러시아인의 고통을 고발했던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조차 인간 속에는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경계선이 인간의 마음 가운데를 지나고 있어서 자기 마음의 한 조각을 자르지 않고는 악을 제거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악인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정인 것이다.
 공산주의는 노동자 농민을 주축으로 한 사회 바닥 계층을 역사의 주인으로 추겨 세우고 평등과 공정한 분배를 약속하며 일어 선 신선한 알들의 선동이었다. 하지만 권력을 쥔 선동가들은 강력한 돌들이 되자 피의 숙청을 일삼아 통치는 살벌하고 백성들의 생활은 비참했다. 그 화려하던 꿈은 너덜거리는 장막 뒤로 사라졌다. 한데 아직도 스스로 정의롭고 가련한 알이라고 우기는 무리가 이지구상에 공존하고 있으니 적은 문제가 아니다.
  기업의 폭리를 견제하고 노동자의 착취를 방어하겠다고 조직된 알의 집단인 노조가 권력을 가진 바위가 되어 유수의 기업을 무너뜨리는 기막힌 현실을 겪으며 누가 돌이고 누가 알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흑백 논리로는 인간의 갈등을 증폭시킬 뿐 적대적 대립이 해소되기 어렵다. 한 때 불의를 일삼던 사람도 회심하여 정의로운 사람이 되기 때문에 세상은 살만한 여지를  품으며 굴러가고 있을 것이다.
 
 여기 관심을 끄는 정보가 있다.
 이탈리아 사회학자 파레토(Pareto)가 우연히 개미들을 관찰하다가 열심히 일하는 놈은 약 20%뿐이고, 나머지 80%는 그럭저럭 시간만 때우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흥미가 발동한 그는 일하는 20%를 따로 갈라서 관찰해보니 그중에서 다시 20%만 일을 하고 나머지 80%는 빈둥거리더란다. 마찬가지로 놀던 놈들을 몽땅 데려다가 놓고 보았더니 그 중 20%는 일을 시작하고 그 나머지는 또한 개으름을 피웠다. 그래서 20-80의 사회심리학적 이론이 탄생했다고 한다. 인간도 이와 비슷한 행동양식과 계층구조를 보여 열심히 일하는 생산 엘리트 20%덕에 사회가 굴러간다는 얘기이다. 일하는 그  20%를 계속 끌어내리면 전체 사회의 질이 떨어지고 국가의 위상은 당연히 뒤처진다. 상위 20%란 아무나 되는가. 남보다 뛰어 나려면 그만한 재능과 노력이 필수다. 강자가 되고 나서 부패하는 사례가 많은 까닭에 강자를 편들기는 꺼림하지만 더러는 정의로운 강자들이 있어 인간사회가 이만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은 무리일까. 

 파레토의 주장이 어떻든지 인간사회는 결코 개미처럼 단순하지는 않아 보인다. 다만 늘 피해자이고 보호되어야만 할 것처럼 인식되는 약자들에게도 불의가 없을 것인지 생각해볼 만한 가치는 있을 듯하다.
 권력을 얻으려는 정치인들이 다수인 약자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권좌를 꿈꾸는 그들의 필사적 방책이다. 불의는 어둠속에서 강물처럼 흐르고 정의의 깃발은  황홀한 유혹으로 펄럭일 뿐이다.
  완벽한 정의는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데도 우리는 늘 정의에 목이마르다.  정의는 간 곳을 모르겠고 정의롭게 보이고자 애쓰는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이니까.

수필가 공 옥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