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충무공 탄신일에 부쳐

2011-04-27     송순강

 

권협(權浹)은 선조때 문신이다. 정유재란때 명나라에 들어가 병선과 군량미를 얻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공으로 선무 2등 공신이 되었다. 그런데 몇 년 전 모방송사의 진품명품 프로그램에 권협 영정(影幀)이 5억이라는 감정 가격이 나왔다. 영정치고는 국보급이다.
그러나 동시대에 살았던 권협보다 세 살이 많은 인물이 있다.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충무공 이순신이다. 장군은 생존 때나 전사한 후에도 난중일기와 시(時)는 남겼지만 영정은 남기지 못했다. 집안이 변변치 못했고 문신이 아닌 무인으로 변방에서만 종군했기 때문이다. 47세 이후에는 거북선 건조, 감옥살이와 전사할 때 까지 영정제작을 할 수 있는 태평시대는 아니었다. 그 대신 선조는 사후 1등 공신과 충무공의 시호를 내렸다. 대저 영웅을 숭배하기 위해서는 영정이 필요했다.
처음 영정은 일제강점기인 1932년 이상백 화백의 작품이다. 하지만 온화한 선비상의 모습 이였는지 학자와 국민들이 반대가 있었다. 두 번째 영정은 1953년 장우성 화백의 작품이다. 이 영정은 지금 현충사 본존에 모셔있고 다시 주물로 만들어낸 것이 우리가 사용하는 백 원짜리 주화이다.
더듬어 보면 장군의 일생은 순탄하지 못했다. 장군은 불운하게도 두 번이나 백의종군(白衣從軍)을 했다. 그 첫째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6년 전인 1587년 동해와 맞닿은 두만강 하류 조선과 러시아 사이에 녹두라는 작은 섬이 있다. 이 섬은 함경도 영흥수사 이경록이 관찰하고 조선만호 이순신은 군을 책임지고 있었다. 어느 날 여진족이 이 섬에 침입하여 아군 11명을 죽이고 군민 160여명을 납치해 갔다. 그러나 1차 정벌에 포로들을 구출했지만 아군의 피해가 많았다. 북병사 이일(李鎰)은 전쟁에 패한 책임을 물어 극형을 권하는 장계를 올렸다. 선조는 패전이 아니다 극형 대신 백의종군으로 공을 세우게 했다.
두 번째 백의종군은 알다시피 임진왜란의 와중에 간첩 요시다 간계에 빠진 반대파 대신들의 묘략이 있었다. 또한 원균의 모함을 받아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을 했다. 이때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두 번째 수군통제사가 됐다. 당시 선조가 내린 것은 함대나 사병이 아닌 큼직한 교서였다. 적과 싸우다 불타고 부서진 고깃배만 한 어선 12척과 120여명의 수군으로 왜선 133척을 대파시켰다.
장군은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내면에는 고통, 분노, 충성에 대한 심리적 문제가 도사려있다. 따라서 장군이 죽을 때까지 정치의식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무력은 탈정치의 무력이며 조정에 사실을 보고하는 일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다시 보면 그는 사실과 의견에 엄격한 무사였고 사실에 충성했다. 임금에 대한 충성도 중요하지만 백성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겼다. 또한 무능하고 무력한 자 부패한 관리들의 좌상을 알리며 처벌과 경질을 요구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장군이 전사한지 400년 이후 50년대만 해도 변변한 군함 한 척도 없었다. 동족이 총부리 속에서 남과 북이 대치 속에 미군이 쓰다 남은 군함으로 반도의 반 토막을 지켜야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 다섯 번째 해양대국이 되었다. 여기에 신(神)의 방패인 이지스함이 개발되어 세종대왕 함을 비롯하여 율곡이이함 최근에 세 번째 류성룡함이 진수 되었다. 생각하면 장군이 고깃배 12척을 앞세워 그 어려웠던 시기에 국가와 백성을 위해 병마와 싸우며 수군을 지휘했던 기나긴 7년 전쟁이 끝나버린 바다에서 전사한 장군의 탄신일을 맞아 국가를 생각한다.

제주시 산림조합 이사 송 순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