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長壽時代의 斷想

2011-03-27     양부임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예술세계엔 영원성을 인생엔 유한성을 시사한 격언인 것 같다. 어느 작가曰 인생도 사회도 썩어야 예술이 된다고 했듯이 예술세계는 무한한 시간이 주어질 때 광채가 나는 것 같다.
바티칸 성전은 세계 최대의 성전으로 1600년대에 완성되었고, 바로크 양식을 대표하는 걸작품으로 100% 청동으로 만들어 졌다. 몇 백 년 전에 만들어진 건축인데도 오늘까지 사용되고 있기에 예술적 가치도 갈수록 높게 평가되고 있다.
예술이란 몇 백 년이 흘러도 관객에게 만족감을 주고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관객의 마음속에 소장하고 싶고 바라볼수록 오감을 뛰어넘어, 아우름의 기쁨까지도 채워놓을 수 있다면 귀중한 예술품이 아닐까? 한다.
고대 그리스인의 평균 기대 수명은 서른 살이었다. 그리스 시민들은 오십세가 되어야 배심원이 될 수 있었다. 그리스 시대에 중년층의 연령은 현대 젊은 연령의 근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1세기 전만해도 약 47세에 있는 선진국의 평균 수명이 78세에 달하는 등, 초로의 인생을 사셨던 부모님의 세상과는 달리 인생의 시간은 길어져 갑절을 살 수 있는 현실이 우리 앞에 도래되었다.  
짧았던 인생의 수치는 갈수록 올라가 지금엔 9988238이라지 않는 가, 99세 까지 88하게 살다가 이삼일 아픈 후에 다시 88하게 살자고. 그럼 백세를 넘겨서 다시 팔팔하게 산다면 토탈 백 팔십 팔세이다. 전혀 불가능한 말은 아닌 것 같다.
근현대 역사에서 가장 오래 산사람은 프랑스 여성으로 1997년에 122세 나이로 사망한 잔 루이스 칼망(Jeanne Louise Caiment)이다. 그녀는 85세에 펜싱을 시작했으며 100살까지 자전거를 탔고 110살까지 혼자서 살았다.
성서속의 인물들에 비하면 애송이의 나이지만, 하루가 다른 과학과 의학의 변천사를 볼 때에, 백년 쯤 흐른 후 우리의 자손들은 선조들이 오늘날에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수명을 알 수 없었듯이 상상을 초월할 인생을 누리다가 떠나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취업률은 저조하고 평생직장도 없는 터에 생산연령에 있는 세대들의 급료 중 몇 십 %는 세금으로 나가고 있다. 자녀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문화마저 사라져 가고 있는 요즈음, 애 하나 낳고 키우는 것도 힘이 들고 버겁다는 젊은 세대들에게 다산의 정책과 노령인구까지 돌보게 함으로 평생 짐을 지게 함은 아닌지?
현 정부 출범 시에 이 대통령이 내건 747(성장률 연 평균 7%,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경제규모 세계7위)구호를 우리는 기대 하였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고 했던 가, 빛 좋은 개살구처럼 747은 우리를 현혹케 하였다.
참여정부에서는 5년 동안 성장률 1% 상승으로 연간 6만 5000명의 일자리 창출 능력을 기록한 반면, 현 정부에서는 5만 6000명으로 16%감소함으로 성장 면에서는 더 떨어지게 하였다. 핀란드의 일부 회사들은 장인(master) 프로그램이 있어 예순이 넘는 근로자들이 젊은 근로자들을 훈련시키고 있는 곳도 있다는데 우리 모두가 심사숙고하면서 헤쳐 가야할 숙제인 것 같다.
예술 프로그램이 방대하게 진행되면서 예술인구가 급증하게 늘고 있다.
좋은 현상이다. 어느 분야이든 모자람 보다는 풍족함 속에서 취사선택을 할 수 있을 때야, 긴 안목과 예견된 관찰력과 투철한 판단력이 길러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술의 가치를 우후죽순 식으로 쌓아올린 후 소비하기 어려운 물량처럼 취급해 버린다면 인생처럼 예술성도 짧아질 것이다.
지나침이란 때론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가져 올수도 있다.
비만한 사람들에게 음식의 지나침은 극약 처방이 되듯 지나친 장수는 자녀의 삶을 기진맥진케 하고, 잘 관리치 못하는 거부들의 돈은 지탄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지나침이란 고귀한 예술성까지도 인간의 수명처럼 좌지우지하게 만들 것이란 생각을 낳게 한다.

사회복지사 양  부 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