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이분법의 사회
세계인구 절반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하루 10만 명이 굶어죽는다는 것이 통계적 수치로 나왔다.
우리의 민족인 북한에선 식량난으로 주민들이 굶어죽는 다는 이야기도 있고, 토끼풀을 뜯어먹으면서 연명하던 스물세 살 된 북한여성의 모습이 방영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사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반면에 선진국반열에 끼어있는 우리는 풍요로운 식생활을 즐기다보니 선진국병인 비만에 걸려 끼니를 일부러 거르기도하고 칼로리 소비를 위해 열심히 운동하느라 야단법석이다. 우리가 먹다 남은 잔반만 모아도 북한주민을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한다.
한 시나리오작가의 아사 소식은 마음속을 허전하고 무겁게 하였다.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드려 주세요.”라는 내용의 쪽지가 죽음 뒤에 남긴 전문이었다.
세계 10위권에 든 경제대국이라 자칭하는 우리나라에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의 자조 섞인 목소리까지 나왔다.
그녀의 죽음이 영화계의 잔인한 현실을 대변해 주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구조적 문제에 대한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취약점이 영화계만이 아니라 사회전반에 걸쳐 널리 널브러져 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급속하게 이뤄낸 산업화로 OECD반열에 오르는 영광은 얻었지만, 뒤안길에 남긴 생체기는 너무 커 보인다. 가진 자와 못가진자로 양분화 된 이분법이 사회에서 한쪽은 사치와 허영으로 들뜬 푼수 명품녀를 만들었고, 다른 한쪽은 88만원을 벌기위해 일자리를 찾아 거리에서 헤매고 있다. 사회적 안전망이 없다보니 지금 이 순간에도 생활고를 비관하여 자살하는 이들이 있고, 비일비재하게 가족동반자살까지 발생하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이 상실되고 극악무도한 범죄들 때문에 서로를 경계하는 불신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다.
자본주의의 폐단인 ‘부익부 빈익빈’ 양극화 현상이 우리의 고유한 가치관과 정서를 뒤집어 버리고 정체성을 흔들리게 하고, 곳곳에 휴머니즘의 상실과 함께 인간다운 모습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개발이라는 이름아래 파 헤져지진 것은 생태환경 뿐만이 아니다. 인간다운 삶인 ‘더불어 사는 삶’의 양태가 사라지고 있음이 안타깝다.
사회의 냉대와 무시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죽음을 우리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한다. ‘사회적 타살’이 일어나는 사회는 죽어있는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선 인간에게 내재된 고유한 가치인 타인에 대한 배려나 보살핌은 물론이고 나눔의 미덕을 찾아보기 힘들게 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고 보자는 경쟁심만 키우다보니 남을 넘어뜨리고 밟아서라도 생존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죽기 아니면 살기’식의 이분법으로 만들어진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살아남아야하고 영광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 된다.
사회적 타살로 인해 아사한 시나리오작가의 삶을 생각한다.
창작의 길은 고된 작업임을 그녀도 느꼈을 것이다. 톡톡 튀는 소재 발굴이 어디 쉬운 일이었겠는가. 노력해도 히트작을 써내지 못하면 노력한 만큼의 보상을 받을 길이 없어 혼자 고된 삶을 살아가는 여류작가 앞에 생존의 투쟁은 가혹한 행위였던 것 같다.
자칭 ‘5타수 무안타’라고 여기는 정신적 허탈과 상실감이 그녀를 외로움 속으로 빠져들게 했을 것이다. 육체적 굶주림과 정신적 허탈감이 지병을 더 키우며 그녀를 고통 속으로 몰며 괴롭혔으리라 생각된다.
그녀의 유작이 되어버린 ‘격정소나타’ 작품의 줄거리처럼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는 건 ‘그녀만의 피아노 연주법’ 이었는데..... 왜 그리 못하였을까.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바로 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문화산업 수출로 한류열풍을 일으켜 경제대국을 꿈꾸는 대한민국이 풀고 나갈 숙제이기도 하다.
강선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