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나의 성 바꿀 수 없다”

한국인 최초 수의사 이달빈 선생 생애 책으로 출판/이문웅씨, ‘성명을 지킨 사람’ 펴내/창씨개명.신사참배 거부…한국인 자부심 끝까지 지켜

2011-01-11     고안석
“창씨를 거부한 인사에 대한 일제의 가혹한 탄압은 극도에 달했으나 아버지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성명을 끝까지 지키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이 너무나 자랑스러워 자손대대에 전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성명을 지킨 사람’이란 제호로 이 글을 마친다”
이문웅씨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이름을 소중히 지키며 일생을 살다간
부친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한 권의 책을 엮어냈다.
‘성명을 지킨 사람-아버님 愚農께서 踏破하신 世路’이란 제목으로 세상사람들에게 선을 보인 이 책에는 저자의 선친인 故 이달빈 선생의 전업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를 경험한 저자의 선친은 1909년 제주인 최초로 일본 유학길을 오를 정도로 남다른 학업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 또한 그해 오사카상공보습학교를 졸업한 후 전문학교 입학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하지만 1919년 2월8일 관서 지역 조선유학생회 주최로 열린 천왕사 공원 조선독립선언서 낭독 및 시위 주역의 한사람으로서 잇까이노 경찰서에 구금당하는 일을 겪었다.
이듬해인 1920년 오사카 부립대학 농학부 수의축산학과를 조선인 최초로 졸업했다. 조선인 최초로 수의사 자격 및 마약취급 면허증도 발급받았다.
이처럼 전도유망했던 이달빈 선생은 1921년 귀국해 강원도 최북단 회양군에 자리를 틀었다.
그는 이 곳에서 李王職 낙곡목장장 운영부장 겸 수의관으로 조선왕조의 남은 재산을 관리하는 일을 수행했다. 이 씨는 이 해 관립 수원고등농림학교 교수직 제의를 거절함으로써 요시찰 대상으로 일본의 집요한 감시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당시 지식인이었던 이 씨는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했다. “부모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성을 내 생을 마칠 때까지 절대로 바꿀 수는 없소”라는 말로 이 씨는 끝까지 자신의 성과 이름을 지켜냈다. 하지만 그 댓가는 처참했다. 몰매와 온갖 모욕이 이 씨를 괴롭혔다.
저자는 이런 선친의 행동에 대해 “독기를 품은 칼날을 휘두르던 시기에 창씨를 거부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렵고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의 극복이기에 나는 이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말로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존경을 표하고 있다.
조선인 최초의 수의사, 초대 창경원 동물원장 겸 수의관, 제주도 최초 가축병원 개원, 최초의 공수의 등 수많은 수식어가 붙어 다니지만 정작 저자의 부친은 이런 흔적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기록이 없기에 저자는 70이 넘는 나이에 조금씩 기억을 더듬으며 이 책을 완성한 것이다.
빠진 것도 많고 부족한 것도 많아 서운하다는 표현으로 아쉬움을 표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와 3.1운동, 한국전쟁 등 근현대사의 비운의 역사 한가운데서 치열한 삶을 살아온 한 지식인의 삶을 글로 남겼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자신의 성과 이름을 끝까지 간직한 한 제주인의 기록이 바로 이 책이다.
이문용씨는 ‘친일파와 창씨개명’‘일본의 역사 왜곡과 우리의 자세’‘호남선’‘한탄강’ 등 70여편의 논문과 수필을 발표했다.
이 씨는 현재 남북협력 제주도민 운동본부 이사, 지구문학 작가회와 녹담수필 문학회원으로 활동중이다. 또한 제주지방법원 민사 조정위원과 고부이씨 대종회 이사직을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