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유감(遺憾)

2010-11-23     제주타임스

벌써 아침저녁으로는 한겨울 추위다.  연말이 성큼 다가왔다. 새로운 다이어리를 장만하고 내년계획을 세워야 할 때가 다시 왔다. 지금은 핸드폰에 다이어리 기능이 있어서 핸드폰에 연간계획을 저장해서 변동이 있을 때마다 수정을 하면서 생활을 하는 시대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다이어리를 보면 연간 계획에서 월간, 주간, 일별, 그리고 하루의 오전, 오후까지 세부적인 계획표 양식들로 정밀하게 구성해보는 게 연말연시의 큰일이었다. 그 속에 미래에 할 일과 약속들을 빼곡하게 채우면서 우리의 시간은 지면으로 양식화된다. 거기에 시계가 첨부되어 바늘이 움직이고 숫자가 넘어가면서 우리의 행동은 공간적으로 양식화된 시간 속에 짜 맞추어 지었다. 우리 시대의 불가피한 생활양식이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유감(遺憾)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을 직선으로 표상한다. 직선은 시작, 중간, 끝이 있으며 균일한 부분들로 나누어 질 수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공간의 성질로 시간을 이해하고 통제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다이어리, 달력, 시계는 시간을 공간(행동 범위)과 같은 성질로 이해하는 데 수반하는 결과물들이다.
하지만 시간은 공간과 달리 연속적일 수는 있지만, 동일한 간격으로 분할되지는 않는다. 철학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의식은 직선과 같은 과거, 현재, 미래의 연속선 위에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의식은 오직 현재 속에 있을 뿐 과거와 미래는 살아 있지는 않는 것이다. 과거는 현재의 기억이고 미래는 현재의 계획이다. 불연속적으로 거듭나는 현재의 과정 속에 인간의 의식과 생명이 있다. 공간 화된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를 균일하게 여겨 의식과 생명이 숨 쉬는 현재를 직선의 균일한 부분으로 무차별 화하여 현재를 망각하며 지내는 우리들이다.
시간을 통제하기 위해 공간적 구성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불가피한 삶의 양식인지도 모른다. 불가피하지만 자연의 본성과는 어긋나는 것만 같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달력과 시계에 대한 부적응은 자연과 생명의 상징이다. 자연과 생명을 제주도말로 쉽게 압축하면 ‘심드렁하게’하게 사는 것이다.  시간을 공간으로 시각화하여 나누고 쪼개고 거기에 활동을 맞추어 가면서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분리된다.
농부의 마음은 천하의 근본이라 한다. 계절이 바뀌고 기후 변화와 농작물이 생장하는 이치에 맞추어 농작물을 생산 하는 농부는 자연의 생명과 더불어 살아간다.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며 자연의 이치를 지혜로 터득하고 자연과 더불어 생명을 유지한다. 우리가 적응해야만 하는 달력과 시계에는 숫자와 글자만 있을 뿐 계절과 기후의 변화도 없고 자연의 생명도 없다. 그런 달력과 시계에 적응하다 보면 사람은 자연으로부터 고립되고 달력과 시계의 기계적인 법칙에 삶이  지배되는 것만 같고, 생명이 없는 것만 같아서 하는 말이다.
미래를 계획적으로 통제하고 준비하는 능력에서 사람들의 편차를 게으름과 성실함의 차이로만 이해하는 것은 바로 편견이다. 시계와 달력에 행동을 통제하는 능력이 선천적으로 약한 사람들이 있고, 후천적으로도 습관화 덜된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나는 그들의 부적응에 연민을 느낀다. 자연적 본성이 강한 사람일수록 부적응은 커지게 마련이다. 그것은 게으름이나 불성실과는 다른 선천적인 부적응의 측면이 있는 것이다. 마치 왼손잡이가 오른손을 사용하려 할 때 타고난 오른손잡이보다 더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이제 곧 12월이다. 말일을 기준으로 결산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기업들은 생산과 금융을 회계연도 연말날짜에 맞추기 위해 분주히 움직여야 한다. 하루라도 늦으면 모든 일은 허사가 된다. 올해의 마지막 날과 새해 첫날에 뜨고 지는 해와 달은 다름이 없고, 지난날이나 꼭 같지만 우리가 만든 사회와 세월의 문화는 달력의 끝장과 앞장의 차이에 따라 결정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신격화된 달력과 시계는 자연의 관점에서 이상스럽지만 우리가 따라야만 하는 불가피한 삶의 양식이리라.
우리들의 삶은 세월의 빛과 바람에 바래는 생의 섭리를 벗어날 수는 없지만, 나무는  나이가 많은 나무일수록 단풍은 더 붉고 아름답다. 몸에 남은 마지막 에너지를 끌어올려 가장 뜨겁게 스스로를 물들임으로써 산 전체를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이다.
반면에 인간은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나이가 들어 몸과 마음도 변화의 탄력을 잃고 현실에 주저앉으려는 경향이 뚜렷해진다.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창시자 프로이트의 말처럼, 삶에 대한 집착은 커지고 순교에의 열정은 식어가는 예를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씁쓰레하게 목격하곤 한다. 또 그런 변화를 성숙이니 원만이니 하는 식의 단어들로 미화하기도 한다. 물질과 지위와 명성 등 외적 가치들을 둘러싼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그런 경향은 더 뚜렷해지고 있다.
이 늦은 가을의 붉고 노란 단풍들은 자신들의 노년의 양식(樣式)을 보여줌으로써, 그 가치를 알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외면하는 우리들을 말없이 꾸짖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수필가 김   찬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