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행복전도사 최윤희님의 자살
'행복 전도사'로 유명해진 방송인 최윤희 씨가 지난 7일밤 경기도 일산의 한 모텔에서 남편과 함께 자살했다.
자살한 고 최윤희님은 ‘자살’을 말리는 방송인이다. 자살을 거꾸로 보면 ‘살자’이므로 한순간을 넘으면 ‘살자’라는 의미라고 말하던 분이다.
유서에는 주렁주렁 중환자실에서 링거주사를 꼽고 세상을 구차하게 떠나고 싶지 않아서 자살을 택했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죽게 되면 말없이 죽을 것이지 무슨 구구한 이유가 따를 것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지레 죽는 사람이라면 의견서(유서)라도 첨부되어야겠지만, 제 명대로 살 만치 살다가 가는 사람에겐 그 변명이 소용될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말이란 늘 오해를 동반하게 마련이므로, 유서에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법정 스님의 말이다. 행복전도사 최윤희 씨의 자살 유서는 법정스님 말대로라면 죽음을 선택한 이유서다.
아무리 중환자실에서 구차하게 생을 마감 하더라도 생에 인연이 다하는 순간까지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 이다. 자살할 수뿐이 없는 참담한 상항에 대해 공자 앞에서 문자 쓰는 격이 되지만 어떠한 어려움이 수반되더라도 병상에서 천수를 다하는 것이 삶의 섭리라고 믿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 것이다. 빨리 가고 늦게 가는 차이뿐이니까 하는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죽음 쪽에서 보면 한 걸음 한 걸음 죽어 오고 있다는 것임을 상기할 때, 사는 일은 곧 죽는 일이며, 생과 사는 결코 절연된 것이 아니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나를 부를지라도 ‘네’ 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존재 할 수 있을까?
이 세상에 올 때도 혼자서 왔고 갈 때도 나 혼자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인간의 유한다.
그리고 티끌 하나 같이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소유한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생의 마지막 정리는 편할 것이다. 죽은 후에도 유산이 없는 것이 자식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유산상속에 대한 소송통계가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인간의 역사는 부를 누리기 위한 투쟁사라고 할 수 도 있다.
또한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것 같다. 소유욕(所有慾)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을 뿐이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고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不辭)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소유욕은 이해(利害)와 정비례한다. 그것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맹방(盟邦)들이 오늘에는 맞서게 되는가 하면, 서로 으르렁대던 나라끼리 친선사절을 교환하는 사례(事例)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소유에 바탕을 둔 이해관계 때문이다.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無所有史)로 그 틀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까.
간디는 또 이런 말도 하고 있다. “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
그가 무엇인가를 갖는다면 같은 물건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가질 수 있을 때 한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자기 소유에 대해서 범죄처럼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뜨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이 육신마저 버리고 홀홀히 떠나갈 것이다. 돈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생각해 볼 교훈이다.
나도 삶이 남아 있음으로 장담은 할 수 없는 입장이지만 병이나 돈으로 삶의 버거워 생을 포기하려는 생각을 가진 사라들이 있다면 사람은 살아있는 한, 모든 일을 새롭게 시작 할 수 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자살을 실행하기 전, 이미 먼저 가버린 가까운 초상(初喪)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내부에 고동 소리를 들으시라고 권하고 싶다.
분명히 이런 말이 들일 것이다. ‘이미 나같이 죽어버린 자와 넌 확실히 달라, 산사람은 지금이라도 돈과 병을 새롭게 조작하는 노력을 시작 할 수 있지 않니!’ 죽은 자가 말하는 이 새로운 시작은 어떤 결정체가 되어 아름답게 빛날지는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이 아름다운 결정체는 치열한 자기 극복과 속찬 성장으로 영그는 것이다. 그 누구의 조언으로 얻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김 찬 집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