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각] 해마다 이게 무슨 꼴인가
1990년대 초반부터 도미술대전 서예부문에 오자 시비가 일었다.
작년에도 1996년 오자논란이 있었던 수상작품이 또 나왔다.
이번 제36회 도전 서예부문 대상작(홍 모씨의 ‘음주구수’)에도 오자가 있다는 지적이 거세다.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음주(飲酒)’ 20수 가운데 아홉번째의 오언시였다.
이른 아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淸晨聞叩門)
서둘러 옷 걸치고 나가 문을 여니(倒裳往自開)
누구신가 몰라 묻는 내 앞에(問子爲誰歟)
마음 좋게 생긴 농부가 서 있네(田父有好懷)
멀리서 술동이 들고 인사 왔다며(壺漿遠見侯)
어울려 살지 않는다 이상해 하네(疑我與時乖)
남루하게 띠 집에 사는 것만이(襤縷茅詹下)
고고하게 사는 것은 아니라 하며(未足爲高栖)
여기 문제점을 요약하면 이미 지적된 ‘루(縷)’자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우선 ‘헌 누더기’의 뜻인 남루는 灆縷 襤縷 繿縷로도 쓰이나 원전에 있는 ‘襤縷’를 충실히 따라야 했다. 대체로 서예는 변화를 주는 것을 소중하게 여긴다. 상하에 서로 같은 필획이 중첩되어 있으면 ‘襤縷’를 취할 일이다.
여기서는 繿縷로 썼다 하더라도 실사(糸)변의 필세가 꼭 같은 것도 문제다. 한 작품에 중복의 획이나 글자가 있는데 앞뒤 생각 없이 그저 한 자 한 자 글자만을 잘 쓰려고 노력한 것 같아 유치하다.
가장 큰 잘못은 ‘누구냐’의 뜻인 ‘誰歟’의 어조사 ‘歟’를 ‘誰與’로 둔갑시킨 것이다. ‘誰與’로써는 이 시문을 풀이 할 수가 없다. 문제의 한시를 뜻까지 하나하나 새기며 썼다면 ‘왜 여(與)자 두 번 나왔을까’ 의문을 품었을 테고, 그러면 원작을 꼼꼼히 따져 보거나 다른 근거를 찾아 ‘수여(誰歟)’의 잘못임을 바로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심사에서는 글자 하나를 통째 다른 것으로 바꿔 써 버리는 바람에 지적되지 못했을 것이다.
인용한 작품의 출처를 밝히지 아니한 것도 상식 밖이다. 워낙 유명한 글이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낙관에서 글의 작가나 출처를 기입하는 상관(上款)이 없는 것도 예가 아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글씨로 평가할 일이지 오자 논란이 유감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예술적 기준을 더 중요시하자고도 한다.
북위서체의 전체 장법으로 연면히 내려쓰는 마당에 점과 획의 잘 쓰고 못씀을 일일이 따지지 말자는 이야기도 있다. 이미 학문과 예술이 분리된 지가 오래되었으니 작가들에게 한학자 이상의 학문을 요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서예가란 모름지기 글씨만 잘 써서 될 일이 아니다. 텍스트조차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텍스트를 먼저 이해하는 것은 서예인의 기본자세다. 공모전에서는 왜 오자가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가. 심사의 공정성과 객관성, 자형에 대한 명확성이 지켜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모전은 휘호대회나 즉서(卽書)와 달라 미리 예보된 것이어서 얼마든지 연마할 시간이 있고 응당 열심히 절차탁마함이 도리이다.
정작 빼어난 글씨라 뽑아 놓았는데 장법(章法)이 타당하지 않거나 오자나 탈자가 있다면 완상하기에 궁함이 있고 깊은 맛이 사라진다. 특히 북위서체의 강건한 특성을 살리려면 점과 획이 지극하여 잘못됨이 없어야 제 맛이 난다. 출품하기까지 작자가 글자와 문장의 의미를 생각해보지 못했다면 전적으로 무지의 소치이다.
일차 책임은 전문가인 심사위원들에게 있고 최종 책임은 운영위원장에게 있다. 바르게 운필함을 어기고, 틀린 것을 바르다고 우기면 그들조차 서예 기술의 바탕이 되는 기본정신과 소양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다른 서예대전에서도 이 같은 일이 없지는 않다. 국전이나 다른 지역전의 서예부문 대상작에 오자가 있는 것으로 드러나면 가차 없이 수상을 취소, 상금도 회수하고 낙선 처리한다. 또는 전시중이라도 대상 작품을 떼어내기도 한다. 해마다 이게 무슨 꼴인가. 망신스런 노릇이다. 작가 자신의 망신임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작가의 선생도 불명예일 수밖에 없다.
김 정 택
제주소묵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