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손자 보았는가.”

2004-12-03     조정의 논설위원

    “자네 손자 보았는가.” 이 말은 우리또래가 심심찮게 건네는 인사말이다. 예전에야 우리나이 쯤 이면 으레 손자 서넛은 보았을 터인데 요즘은 그게 아니다. 서넛은 고사하고 한둘 보기도 쉽지 않다. 손자 보기가 쉽지 않다는 건 손자 드문 시대에 살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며느리 나이 서른다섯이 낼 모랜데 아이 가질 생각을 않으니”
손자 못 본 친구의 푸념이다. 이런 말을 들을 때면 손자 드믄 시대를 살고 있음이 실감이 난다. 신문마다 저 출산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호들갑을 떨어보지만 정부의 대책은 미미하다. 저 출산과 고령화 사회, 이거야 말로 엇박자 행진이다.  

   지방자치단체마다 인구가 줄어든다고 야단법석을 해도 저 출산을 막을 기발한 대책을 내놓지 못한다. 출산을 장려해야 한다고 억양을 높여보기도 하지만 일회성 목소리로 쉽게 자자들고 만다. 인구 억제정책에 행정력을 동원했던 시절이 어제 같은데, 이제야말로 출산장려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출산을 억제하던 시절, 그 때 인구 억제정책 중 하나가 젊은 남성들에게 정관수술을 받게 하는 것이었다. 그 시절, 예비군 훈련장에만 가면 인구 팽창을 막아야 나라가 선다고 역설하는 걸 들었다. 예비군 훈련 보다 산아제한에 대한 강연이 우선하던 시절이었다. 그 때 산아제한만이 애국하는 길이라는 연설은 진지하기 까지 했다.

   당시 예비군들에게 ‘인센티브’를 주고 정관수술을 받게 했던 특단의 조치는 정부가 선택한 최선의 방안이었을 것이다. 정관수술을 받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혜라야 고작 훈련면제 정도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수술을 받은 걸로 알고 있다.

   정관수술정책이야 말로 한 해에 60만 명 씩 불어나는 인구를 억제하려는 정부의 고육지책이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 때 정관수술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애국자라고 비아냥거리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얼마나 인구 억제정책이 화급을 다퉜으면 거리마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가 요즘의 불조심 표어 보다 더 많이 나붙었을까. 그 시절, 제일 많이 부쳐졌던 표어가 ‘간첩신고는 113’과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가족계획 표어였다.

  그렇게 팽창일로를 달리던 출산율이 언제부터 감소 현상으로 회귀했는지는 알바 없으나 이제 출산을 장려할 시대가 도래 한 것만은 분명하다. 출산율 1.17, 이 수치대로라면 가임여성 한 사람에 아이 하나 남짓한 수치이니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손자 보기 쉽지 않다는 말을 들으며 일곱 남매를 낳은 어머니가 우리나이쯤에는 손자를 몇이나 보았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열은 넘었으리라. 어머니나 우리나 다산시대를 살아왔다. 지난시대에는 출산을 여성의 당연한 의무로 받아드렸다. 어머니시대도 그랬고 우리시대도 그랬다. 그 시절엔 다산을 가문의 영광쯤으로 여기며 살았다.

  가문의 영광? 현대여성들은 그게 아니다. 출산은 여성의 권리도 의무도 아닌 선택일 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들의 당찬 목소리를 들으며 너무 이기적이고 영악스러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며느리 나이 서른다섯에 아이 가질 생각을 않는다”.는 초로(初老)의 푸념이 남이 말 같지 않게 들린다. 하기는 이제 여성들도 일을 해야 사는 시대다. 이쯤에서 정부가 출산을 장려하려면 여성들의 눈에 확 들어오는 기발한 발상이 있어야 됨직하다. 나이가 들었음인가. 손자 셋쯤 보기가 쉽지 않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씁쓸한 입맛을 다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