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각] 며느리가 속아 넘은 여시(여우)불
하늘은 맑고 햇볕이 유난히 내리쬐던 2009년 4월 점심시간을 막 넘긴 시각 제주시 중산간 지대에 위치한 과수원 옆 조그만 임야에서는 일가족 4명이 황급히 꺽은 소나무가지를 이용하여 땅바닥을 내리치며 불길을 잡고 있었다.
연기는 심하지 않아 행여 누가 볼까 걱정하는 염려는 덜었지만 혹 바람이라도 세차게 불어오면 영락없이 큰 산불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라 날아오르는 재와 땀에 온몸이 범벅이 되어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어느덧 일가족의 바쁜 손놀림은 멈추었지만 그 누구도 안도의 말을 할 수가 없었는데 겨우 불길을 다 잡았다 싶어도 연기 없이 타들어가는 불꽃을 쉽게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어디에서 또다시 불꽃이 일어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 가족은 지난해 잘라낸 가지를 조금씩 태우던 중 점심을 먹기 위하여 시아버지는 며느리에게 불 피운 자리를 잘 마무리하고 오라며 자리를 뜨게 되었는데 모닥불피운 자리를 지켜본 며느리는 바람도 없지만 불꽃이나 연기도 보이지 않아 자리를 비웠는데 식사를 먼저마치고 자리를 뜬 시아버지가 불이 번지는 것을 확인하고 온 가족이 나서서 불을 끄게 된 내력이다.
농사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던 봄철, 해충과 잡풀을 태우기 위하여 밭두렁과 돌담에 불을 놓아 소각하였고 이런 경우 때로는 큰불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습도가 많아 불완전 연소현상으로 심한 연기를 발생하던 때와 달리 봄철 건조기가 오래 지속되면 마른 나뭇잎이나 풀잎이 타는 불꽃을 쉽게 확인하기가 어렵게 된다.
이런 현상을 두고 제주의 조상들은 불이 사람들의 눈을 너무나 감쪽같이 속였다하여 일명“여시불”(여우같은 불)로 부르기도 하였다.
2009년 산불정보를 토대로 살펴보면 전국적으로 570여건의 산불 가운데 2~5월 에만 전체의 72%를 차지하고 있는데 입산자, 성묘객에 의한 화재는 줄고 있지만 주택이나 축사주변 쓰레기소각 등 생활권 주변에서 산불발생률이 높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시대적으로 방화성, 축제성 실화가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 산불이 급작스럽게 진행방향을 바꾸면 노약자인 경우는 쉽게 자리를 피할 수 없어서 화상뿐만 아니라 연기에 의한 질식사를 유발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작은 불길이라 하여도 진압활동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연로한 시아버지의 검게 그을린 운동화와 얼굴에 흐르는 땀을 바라보고 뒷불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죄책감에 고개를 들지 못한 며느리에게 “옛사람들도 오죽하였으면 3,4월에 붙는 불은 여시불(여우같은 불)이라 하였겠느냐”며 눈에 쉽게 보이지 않고 조용히 타며 번져나가는 고온 건조기의 화재의 위험성을 무시하기 쉬운 우리들에게 완곡하게 강조하는 일화였다.
허 은 석
제주소방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