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동 엘레지'
성안 사람들의 마음의 고향
'탑동에 가면 제주바다 가득히
외적이 쳐들어오는
바람소리들이 있다. <중략>.
가슴 가슴 부서지는 토박이들
비명소리가 하얗게 하얗게 있다'
제주 토박이 시인 문충성의 시 '탑동'중 몇 소절이다.
그는 탑동바다 매립과 그 후에 변화되는 상황들을 외적의 침입으로 비유했다.
유년을 헤엄치고 하늬바람 속에 겨울을 빚는 파도 소리가 초가지붕을 넘나들었던 옛 정취가 개발의 이름에 밀려나고 삶의 터전인 바다밭이 망가지는 것을 보면서 그는 울부짖었다.
'괴로와 울었다 바다는 괴로움을 삭이면서 끝남이 없는 싸움을 울부짖어 왔다'는 그의 시 '제주바다.1'의 한 소절은 그래서 탑동을 마음의 고향으로 여겼던 이들의 아우성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바로 탑동의 슬픈 노래다.
그렇다. 탑동 바다는 제주시 성안 사람들의 마음의 고향이었다.
거기서 유년을 자맥질 했고 거기서 낚시를 하고 해산물을 땄다. 어린시절에 놀이터였지만 성인이 되어선 생활터전이었다.
기업이 짓밟아 버린 삶의 터전
그런 탑동 바다가 게걸스런 악덕 기업의 먹이 감이 돼 버린 것이다.
1991년의 탑동 매립공사는 바로 제주시 성안사람들의 유년의 추억을 찢어버렸고 삶의 터전을 짓이겨 버렸다.
탑동 해안을 바다밭으로 일구며 생계를 유지했던 해녀들의 목숨을 건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권력을 등에 업은 기업이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인 결과다.
그래도 도민적 저항이 들불처럼 거세지자 개발이익의 사회환원이라는 너울을 쓰고 가까스로 사업을 진행시켰던 것이다.
당시 제주시 당국과 사업자 범양건영은 개발이익의 사회환원을 담보하게 될 '탑동협약'을 체결했다.
장학금 20억원 출연을 비롯 병문천 하류에서 서광로까지 2058m 구간 복개를 담보하기 위해 매립지역내 범양건영 소유토지에 대한 근저당도 설정했다.
그러나 범양건영은 복개사업 일부만 마치고 여타 약속은 10년넘게 지키지 않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최근에는 약속이행 촉구여론이 비등해지자 되레 "약속 이행을 못하겠다"며 제주지법에 기습적으로 제주시 상대 '근저당 등기 말소 소송'까지 제기했다.
한마디로 기업의 윤리한계 영역을 스스로 짓밟아 버린 것이다. 비열하고 간교한 반기업적 행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제 잇속만 챙기기 위해 온갖 야비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덕 기업의 표본을 보는 것 같다.
기업이 사회적 책임 저버린 패륜
당시 탑동해녀들고 주민들의 매립반대는 삶의 터전을 지키겠다는 몸부림이었다.
이같은 탑동해녀와 주민들의 생존권 투쟁이 도민적 반대운동으로 번져나가자 업자측이 스스로 개발이익의 사회환원을 약속한 것이다. 이는 탑동주민은 물론 제주도민에 대한 약속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범양건영측은 "개발이익의 사회환원 약속은 강압에 의해 이뤄졌다"며 약속이행을 거부하고 있다. 근저당 말소 소송까지 제기한 것이다.
주객이 전도 됐다. 급할 때 살려달라고 애원하다가 여유가 생기자 은인의 뒤통수를 치는 꼴이다.
이는 탑동 해녀들을 두 번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도민들의 자존심을 짓이겨 농락하는 것이기도 하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패륜적 기업행태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런 몰상식과 비윤리는 개발과 관련해 도민들에게 반기업 정서만 키워줄 뿐이다.
기업윤리의 가치는 공동체와 함께 할 때 빛이 난다. 공공성과 공익성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 영역에 속한다.
따라서 범양건영이 눈꼽만이라도 기업윤리가 남아 있다면 당장 소송을 취하하고 약속을 지켜야 한다. 그런 연후에 도민들에게 엎드려 사죄해야 한다.
그렇게 못하겠다면 탑동바다를 원상대로 복원시켜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기업의 양심을 일깨우는 것이다. 부도덕한 기업이 더 이상 제주를 농락해서는 안된다.
또다시 슬픈 '탑동 엘레지'를 듣는다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