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각] 추억의 양은도시락과 행복e음

2010-03-04     제주타임스



지난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너무나 가난했던 시절, 시커먼 깡 보리밥이 창피해 도시락 뚜껑을 반만 열고 도시락을 먹었던 추억, 어머니는 식게집에 다녀온 곰박을 보리밥에 썩어 반지기 밥을 만들어 도시락밥을 싸주시던 그때, 반찬국물에 절어 두꺼워진 국어 책갈피를 본 선생님이 ‘너 고시공부 하냐’며 핀잔을 주기도 해 귓불 까지 빨개졌던 기억도 아련하다.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 2교시 쉬는 시간, “선생님이 교실 앞문으로 들어서자 아이구 김치 냄새, 도시락 까먹은 놈 나와. 자수안해, 모두 책상 위로 기어 올라가” 선생님이 냅다 교탁을 쳐대며 소리를 질렀던 추억들..

친구에게 도시락 뚜껑에다 밥 절반을 뚝 잘라내 말없이 내밀만큼 순수했었고, 함께 냉수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우정을 쌓았던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도시락 대표주자는 양은(洋銀)도시락이었다. 재질이 별로여서 뚜껑이 뒤틀려 맞질 않았고 바랜 색깔도 엇비슷해 집안에서도 형제들끼리 도시락을 곧잘 바뀌었다. 밑바닥은 송곳으로 쑤신 것처럼 ‘송송’ 올라와 녹이 슬면 삼양해수욕장 검은 모래로 도시락을 박박 밀며 닦던 추억이 아련하다.

이후 양은 도시락이 스테인레스나 앙증맞은 플래스틱이 등장하면서 박물관으로 밀려났지만 40대이상 세대에는 추억이 솔솔 묻어나는 샘터로 자리매김 하게 된다. 5남매의 도시락 챙겨 주시느라 으레 아침을 걸렀던 어머니의 손길, “양은 도시락밥을 담고 한쪽에 콩자반·지시(마늘지)·간장에 메리치를 담가, 두어 가지 반찬을 싸가지고 다녔던 ” 기억이 새롭다.

‘도시락과 반찬국물’은 ‘실과 바늘’처럼 불가분이었다.

고무패킹이 든 손바닥만한 반찬통이 나오기 전에는 도시락 왼쪽에 밥을 덜 담고 세로로 뚜껑 없는 반찬그릇이 따로 들어갔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도시락을 뚜껑으로 덮어버리니 김치는 밥 열기에 푹 삭으면서 국물 생산을 재촉했다.

옆자리 친구가 싸 온 양은도시락을 싼 얇은 보자기는 반찬국물로 지도를 그렸고, 진동하는 냄새에 반 아이들은 아침마다 짜증을 내며 웃던 학창 시절, 반찬국물이 밥 칸으로 넘어와 한여름이면 쉰 밥되기 일쑤였다.

잘사는 반 아이들은 쌀밥 위에 독새기(달걀) 프라이가 얹혀 있으면 주변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껏 샀다. 어쩌다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한 날 점심시간에는 교실에 남아 있기가 쑥스러워 슬며시 자리를 떠 구석진 교실 입구 계단에 앉아 운동장을 처량하게 내려다보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학교가 파한 코흘리개들은 죽어라 집으로 달려왔다. 집안 괴투멍에 식게(제사)떡이나, 주전부리가 없나 해서다. 달릴 때마다 책보나 가방 속에서 반찬통이 딸그락거려 오늘날의 ‘호루라기’를 대신하곤 했다.

지금은 추억의 도시락이 된 노란 양은도시락을 생각하며 교실이 아닌 사무실에서 제주시 주민생활지원과에서는 지난 ‘07년 2월부터 매주목요일을 정하여 "추억의 양은도시락과 함께 작은 정성 행복나누기 운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일주일에 한번 집에서 준비해온 정성스럽고, 맛있는 도시락을 먹으며 점심은 웰빙으로 챙기고, 점심 값은 양은 도시락 모금함에 채워져, 어려운 계층을 대상으로 결연·후원을 통해 우리의 이웃들이 사회의 동등한 일원으로 당당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서포터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볕뉘 자원봉사단’을 구성 매월 1회 우리 주변에서 소외된 이웃과 복지시설내 청소,
환경정비와 식사보조 및 노인?장애인 돌보미 봉사활동을 꾸준히 펼치고 있으며, 우리 주변에 도
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찾아가 시민들에게 가까이 있음을 알려가고 있다.

행복e음을 통하여 어려운 이웃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고 더불어 사는 사회 조성을 위한 전 시민운동으로 확대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복지를 여는 30여명의 구성원들은 오늘도 사회안전망 구축에 작은 실천을 하고 있다.

허  철  훈
제주시 주민생활지원과 통합조사관리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