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첫 순교자 김기량

2004-11-20     제주타임스

'어와 벗님네야 치명(致命)길로 횡행하세/ 어렵다 치명길이야 평생 소원 사주모(事主母)요/ 주야 앙망 천당이로다 / 펠릭스 베드로는 능도(能到) 주대전 하옵소서' 이는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가, 가톨릭 교우들을 벗님으로 표현하면서 만민평등과 형제애를 드러내려고 지은 옛 가사이다.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그는 함덕리 출신으로 제주의 첫 영세자이며, 모진 박해를 받다가 가슴에 못을 박는 처형을 당한 순교자이다. 우리는 이제, 그를 한 사람의 종교인으로가 아니라, 역사의 주역으로 제주사 한복판에 끌어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가톨릭 신자가 되었을까? 그는 배에 약재와 그릇들을 싣고  서귀포를 거쳐 모슬포로 장사를 다니다가 폭풍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 해류에 밀려 중국 광동까지 흘러갔을 때, 바다를 지나가던 영국 배에 발견되어 구조를 받았다. 그는 홍콩의 파리외방전교회 대표부로 가서 생활하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조선인 신학생에게 교리를 배웠다. 그후  루세이 신부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제주 출신의 첫 번째 신자가 되었다. 그후 1년 2개월만에 고향땅을 밟고 고향 제주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제주도에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이 알려진 것은 신유박해 때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가 유배되어 오면서부터였다. 이후 김대건 신부가 제주에 표류하였다. 김기량은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하였으며, 이웃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자가 되었다. 그런데 최근에, 김기량에 관한 기록이 있는, 편지들의 발견으로 적잖은 사실들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영세 연월일을 알아낸 것이다.

김기량은  1857년 성령강림주일에 영세와 동시에 첫 영성체를 했다. 부활절이 4월 12일이므로 그의 영세일은 5월 31일이 된다. 이에 따라 천주교제주교구는 이 날을 성대히 기념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김기량의 족보 '김해 김씨 좌정승공파 신방계'의 존재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입수함으로써, 그의 정확한 생몰연대와 집안 내력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이번에 확인된 족보는 제주교구가 제주 선교 100주년을 맞아 사료 수집에 들어간 이래 7년간에 걸친 노력 끝에 발굴한 것이어서 뜻 있는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같은 일련의 사료 발굴에 대해 사학자들은 순교자를 향한 '거룩한 인내'의 결과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가톨릭은 순교자의 행적을 밝혀줄 사료의 대량 발굴은 박해 시대 한국 순교자 관련자료 발굴 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기뻐하고 있다.


  김기량의 순교는 당시 우리 제주도에서 싹트려는 복음의 씨앗을 무참히 짓밟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헛되이 피를 흘리고 죽어간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가 흘린 피는 우리 제주도의 신앙의 밑거름으로 뿌려졌으며 길이길이 빛날 것이다. 우리는 김기량의 파란만장한 생애, 그리고 순교의 정신을 우리 제주사에 각인시켜야 한다.

요즘 북제주문화원은 역사유적지를 발굴하여 표석을 세우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일차적으로 한경면 지역 역사유적지를 조사, 표석을 설치를 서두르고 있다. 우리는  김대건 신부의 제주 기착지와 북제주군 관내 최초의 신창공소에 대한 자료도 조사하였다. 이런 과정 속에서 김기량이 생가를 확인하고 그의 고향 함덕리에 표석이라도 세우면 어떨까하는 생각이다.

논설위원 김 관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