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바보다”
시류 타지 못하면 바보소리 들어
그는 바보다
권모(權謀)와 술수(術數)가 얼싸안아 춤추고 역리(逆理)가 순리를 농락하는 사회에서는 그렇다.
온갖 협잡(挾雜)이 원칙을 유린하고 반칙이 정의와 양심을 짓밟는 세태에서 보면 그는 정말 바보다.
그는 지도자의 좋은 덕목을 두루 갖추고 있으면서도 ‘바보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뛰어난 기획력과 분별력, 앞을 내다보는 비전과 예지(叡智), 정보처리 능력과 강력한 추진력, 이를 설득 할 수 있는 웅변력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부러워하는 그의 자산이다.
제주삼다수 개발ㆍ제주국제컨벤션센터 건립ㆍ제주섬문화축제 기획 및 섬 유엔(UN)구상ㆍ해외증권 발행을 통한 외자 도입ㆍ특별경제자치구를 내용으로 한 시범자치지역 시도 등등은 그의 이런 자산이 바탕이다.
여기에다 그는 정의와 양심을 얼개로 한 원칙을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보석처럼 빛나는 이런 무형의 자산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는 바보소리를 들었다.
시류(時流)트는 법에 서툴기 때문이다.
약삭빨라야 살수 있는 사회
지도자가 광기 휘몰아치는 야만의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카멜레온식 변색에 능해야 한다.
특히 정치판에서는 그러하다.
소신보다는 이리저리 눈치를 보다가 약삭빠르게 권력의 등에 편승할 줄 알아야 한다.
불리하면 “네탓”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는 후안무치(厚顔無恥)도 배워야 한다. 샐샐거리며 권력에 머리 조아리는 아첨은 몸에 배어야 할 생존전략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질 못했다. 바보소리를 듣는 이유다.
원칙과 소신은 그의 처세 철학이다. 정의와 양심은 그의 신앙고백이나 다름없다.
부당하고 불의한 권력과의 타협은 생리가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 탄압의 빌미가 됐다. 그것은 정치 시련의 씨앗이기도 했다. 수차례의 검찰출두와 4일간의 감방살이도 그렇다.
그래도 그는 원칙을 위해서라면, 조직을 위해서라면 1%의 가능성에도 몸을 던져 올인하는 바보짓을 서슴지 않는다. 독선과 독단이라는 비판은 여기서 나온다.
농.축협 통합에 반대하여 국회에서 ‘할복’이라는 극단을 택했던 것도 죽음으로써 조직을 지키겠다는 책임감의 발로였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돈키호테 식 저돌성’이라는 세간의 입방아를 모를리 없는 그다.
그렇지만 불의한 권력과 정치권의 야합을 고발하고 농축협 강제통합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할복’을 동원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불 지피는 ‘제주에의 무한 사랑’
그는 아직도 “안일한 불의(不義)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걷는다”는 육사 시절 생도 신조(信條)를 품어 사는 듯 하다.
정의와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려면 바보가 되고 원칙과 상식을 지키려면 무능으로 손가락질 받는 요지경 세상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는 바보소리를 들으면서도 ‘제주에의 무한 사랑’에 빠져있다. ‘제주에의 무한 충성’을 다짐하고 있다.
자존과 경쟁을 통해 제주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엮고 있는 그의 열정은 여기서 비롯된다.
그가 제주도의 1차산업 혁신을 통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친환경 농업’에 뛰어드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제주에 대하 모든 것을 사랑하리라. 더러운 것 악한 것까지도 사랑할 것이다. 나는 나이을 잊고 시작할 것이다”.
그는 ‘자전적 일 이야기’를 엮은 책의 끝을 이렇게 맺고 있다. 이는 그가 부르는 제주사랑 노래다.
신구범. 결례를 무릅쓰고 나는 그를 “바보”라 부른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바보가 많아야 제주가 변화 될 것임을 굳게 믿는다. 이런 바보는 제주의 희망이다.
역설의 논리를 동원해 ‘바보 신구범’을 이야기하면서도 부끄럼타지 않는 것은 그가 아무 권력도 없는 농사꾼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결 마음이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