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의 귀향

2004-11-10     제주타임스

강나루 건너서 / 밀밭길을 //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 길은 외줄기 / 남도 삼백리 / 술 익은 마을마다 / 타는 저녁놀 //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가을의 끝자락에 접어 들어서일까.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라는 싯구가 떠오른다. 이 시는 삶의 변경을 떠도는 인생의 덧없음의 표상물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나지 않고 초월로 고양되는 데에 그 깊이가 있다. 나그네는 ‘집을 나온 사람’의 뜻으로 풀 수 있다. 나그네는 여러 측면에서 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화에서 나그네는 시련 받는 자로 상징된다. 유리 왕자가 주몽을 찾아서 떠나는 길이나, 감은장애기가 부모에게 버림받아 떠도는 일 등은 모두 나그넷길이다.

풍습에서 보면, 사람이 이승을 사는 것은 본고향(本故鄕)을 떠나 잠시 와서 머무는 일이고, 장차 돌아갈 과정일 따름이라 하여 인생 자체를 나그네로 상징하기도 한다. 웃어른의 사망을 ‘돌아가시다’라고 함은 고향으로의 희귀를 표현한 말이다. 이승의 인생이 나그네살이라면, 저승에서는 주인이 된다는 것이므로 ‘돌아감’은 긍정적이 아닐까 싶다.

테사룬 땅을 떠나 타양에서 나그네살이를 하면서도 늘 그리워 하는 것은 고향이다. 한국인 만큼 고향을 그리워하는 민족도 그리 많지 않을까 싶다. 어느곳 어느 자리이건 고향이야기만 나오면 신나기도 하고 향수병을 앓기도 한다.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는 한마디 속담에서 우리는 고향의 그리움을 극명하게 읽을 수 있다. 타양에서 고향사람들이 모이면,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라는 고향의 봄을 합창한다.

어디 그 뿐이랴. 일제 강점기에는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 길 / 지나온 자욱마다 눈물 고였네…>라는 ‘나그네 설움’을 부르면서 고향과 고국을 그리워했다. 6?5로 남북이 분단되면서, 고향을 이북에 남기고 온 실향민들은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 저 하늘 저 산아래 아득한 천리…>라는 노래로 망향의 한을 달랬다.

지금도 고향을 떠나 사시는 분들은 죽어서 고향 산천에 묻히는 꿈을 간직하고 있다. 근래에 두 분 예술가의 향기로운 귀향 이야기를 매스컴을 통해 읽으면서 고향의 소중함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먼저 미당 서정주 시인의 국화꽃 귀향이다.

미당 서정주의 고향인 전북 고창군 질마재를 뒤덮은 노란 국화를 보면서 들판에 진동하는 국향을 맡을 수 있었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 봄부터 소쩍새는 / 그렇게 울었나 보다 /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국민의 애송시인 ‘국화 옆에서’를 쓴 시인의 무덤이 있는 고향 마을사람들이 5천여평의 야산에 7만여 포기의 국화꽃동산을 만든 것이다. 시인은 국화꽃으로 환향 했다.

두 번째의 감명 깊은 귀향은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이 50년만에 고향 통영을 방문하여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한국 문단의 거목이 된 자랑스런 통영의 딸을 현수막을 걸어 환영했고, 통영문학관에 들어설 때 고향사람들은 기립하여 ‘고향의 노러를 합창했다고 한다. 이에 박경리 선생은 ‘제가 통영에서 태어나고 진주에서 공부하지 않았다면 전대로 「토지」를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는 귀향사로 고향과 재회했다.

이렇듯 감명 깊은 예술가들의 귀향을 보면서, 우리 제주 출신 예술가들의 아름다운 귀향을 꿈꾸어 보는 것은 한낱 백일몽일까. 제주가 낳은 예술가들이 귀향하고 그 격조 높은 예술혼들이 여러 가지 상징으로 부활했으면 소망해 본다. 마을사람들이 기념관도 짓고 예술의 동산도 만들고, 예술의 비석을 세워 가는 소중한 작업들이 펼쳐 지는 날, 제주는 예술의 고향이 될 것이다.

현 춘 식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