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부(富)와 행복
며칠 전 올해 국가별 행복지수를 영국의 신경제학재단(NEF)에서 발표했다. 행복지수 1위가 중미의 코스타리카가 차지했다.
0위권 가운데 도미니카(2위), 자메이카(3위), 쿠바(7위) 등 중남미 나라가 9곳이나 되었다. 베트남이 5위로 아시아에서 홀로 10위안에 들었다.
선진국에선 네덜란드가 43위, 독일 51위, 일본 75위, 미국은 최하위권인 114위, 우리나라는 68위다. <story of NEF>
국가별 행복지수는 측정기관이 어딘 인가, 어떤 변수를 보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날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행복감은 부를 최고가치로 놓고선 남과 비교에서 오는 수가 많다.
20만 원짜리 운동화를 신은 아이의 만족감은 운동화의 질과는 별 관계가 없다.
자기 운동화에 유명 브랜드가 붙어 있다는 걸 친구들에게 과시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다른 아이도 다 유명브랜드를 신게 되면 그 운동화를 신는데서 오는 만족감은 뚝 떨어질 것이다.
결국 사회가 행복해 지기 위해선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올해 발표된 국가별 행복지수도 GDP와 상관없이 상대적 결핍감오는 것이다. 과연 이것은 진리일까? 문제는 마음이다.
타인들의 부러워하는 것으로 자신을 과시하는 것은 진정한 행복은 아니다. 진정한 행복은 자기에게도 이로우면서 타인에게도 이로워야 진정한 행복이며 행복감이 오래간다고 불가에서는 전해진다.
불가에서는 ‘자리이타(自利利他)’라는 말이 있다.
남에게 이롭게 해야 자기가 이롭다는 말이다.
어떻게 해야 자신과 타인의 동시에 행복해지는 자리이타를 구현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 방법을 불가에서는 보시(布施)라고 한다.
자기의 돈이 나가는 보시가 타인에게는 이롭겠지만 자신에게는 어떤 이로움이 있단 말인가? 그 이로움은 ‘보람’이다.
좋은 일을 하면 마음속이 뿌듯해진다. 보람이 생긴다. 보람이 행복감의 주춧돌 이다.
보람이 있는 삶과 없는 삶은 확연히 다르다.
보람을 끼는 인생이 성공한 인생이다.
자기 인생이 의미가 있는 인생이라고 느낄 때 인간은 구원을 받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윤회(輪廻)와 환생(還生)의 원초는 보람이며 보람이 후생(後生)으로 연결된다고 믿는다.
보람이 있으면 무의식(無意識unconscious)이 밝아진다고 한다. 자기 무의식의 밝은 사람은 기분 좋은 일(보람)을 많이 한사람이라고 한다.
자기 양심에 꺼림칙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무의식이 어둡다.
육신은 없어져도 무의식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다음 생으로 이월된다는 것이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무의식은 비행기의 블랙박스와 같은 것일 수 있다.
비행기의 동체는 파괴되어도 블랙박스는 남는다. 블랙박스에는 그 사람이 살아생전에 어떻게 살았는가가 전부 기록되어 있다.
이 무의식이 염라대왕이 장부책인 셈이다.
저승에 가면 그 사람이 이승에서 쌓은 업보를 비추어본다는 업경대(業鏡臺)라고 하는 거울이 있다고 한다.
이승에서 형법판례다.
저승에서 형법판례인 업경대도 생각해보면 자신의 양심이요, 무의식일 것이다.
이런대도 타인들의 행복감을 저감시키는 과시형 물욕은 허망한 것은 분명하다. ‘명심보감’ 성심(省心)편에 있는 말이다.
의롭지 않는 재물은 끓는 물위에 뿌려지는 눈(雪)과 같고, 그것으로서 누리는 영화는 아침에 이는 구름, 저녁에 지는 꽃처럼 허망하다는 말이 있다.
재물로 과시하는 행복감은 허망하고 무상(無常)한 것이다.
아무리 땀을 흘려 쌓은 부자라고 할지라도 하루아침에 잃을 수도 있다.
부자가 삼대 가기 어렵다는 말이 있지만 당대에서 몰락하는 경우도 숱하다.
요즘 보면 돈이라면 동물적 근성으로 모으고, 일단 부동산 운이 좋아 돈을 쥐면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은 신흥부자들이 보인다.
이들은 이웃들에게 상대적 좌절감을 심어주고 소통에 벽담을 쌓고 있는지를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한다.
배고픈 것은 살지만 배 아픈 것은 못사는 요즘이다.
재물은 본래 내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내 것인 양 움켜주고 나라의 행복지수를 저감시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재물은 부둥켜안으면 하늘이 거둬가고, 재앙이 앗아간다는 옛날 속담이 생각나서 하는 말이다.
김 찬 집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