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대전 산내학살’ 위령제
어찌해야 좋을까? 오늘 하루만이라도 엎드려 통곡을 하고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의 한이 풀릴 수 있다면, 정말 다시 한 번 소리 내어 실컷 울고 싶다. 살아남았어도 죽은 듯이 살아야 했고,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억압과 치욕 세월, 울음과 탄식이 금지되었던 세월이었다.
제59주기 대전 산내학살 희생자위령제가 지난 7월 1일 대전에서 열렸다. 제주4·3사건희생자유족회 회원들은 올해도 회원 80여명이 그곳을 찾았다. 매년 대전 골령골을 찾고 위령제에 참석하여 머리를 조아리면서 다시는 어두운 역사가 되풀이 되디 않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마음은 늘 한결 같았다.
대전 산내학살사건은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2주 만인 1950년 7월 첫째 주에 제주4__3 관련 수형인을 비롯해 예비 검속된 각 지역의 보도연맹원 등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던 민간인이 대량 학살되고 암매장된 사건이다.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제주출신 ‘1949년 군법회의’ 대상자 3백여 명이 수감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한국전쟁 이후 제주에 살아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다.
그곳에는 제주4__3사건, 여순사건 등과 관련된 정치사상범과 일반죄수 등 4천여 명 정도가 수감되어 있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굴 공개된 현장 총살 사진은 당시 참혹한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총살 명령은 의심할 바 없이 최고위층에서 내렸다. 대전형무소에서의 정치범의 처형은 3일이 걸렸으며, 1950년 7월 첫째 주에 발생하였다”고 적혀 있다. 대전형무소에서 학살된 수는 여순사건 관련자 1천2백여 명, 제주4.3 관련자 3백여 명 등 총 1천8백여 명이라고 하고 있으나, 외신기사는 7천-8천여 명이 학살된 것을 보았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한마디로 ‘산내동의 골령골'은 한국 전쟁 당시 '테러의 여름'(summer of terror)속 '킬링필드'(killing field)였다. 한국군과 경찰이 무고한 사람들을 집단으로 처형했으며, 미국 맥아더 사령부는 사실상 이를 묵인했다. 1950년 8월 일본 도쿄에 머물던 맥아더 장군은 학살당한 200~300명의 민간인 가운데 여성과 12세 소녀가 포함됐다는 보고를 받고, 한국 군경의 '잔인함'(extreme cruelty)을 언급했다.
이처럼 집단처형을 묵인 방조하는 미국의 애매모호한 태도는 그 해 가을까지 계속되다가 결국 영국군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영국군 장교들이 1950년 12월 미군 점령 하에 있던 북한 지역에서 총살 직전의 민간인 21명의 목숨을 구했으며, 더 이상의 대량학살을 막기 위해 서울 외곽의 이른바 '처형의 언덕'(Execution Hill)을 장악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집단처형지에 대한 언론의 접근을 금지했으며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이승만 당시 대통령과 핵심 참모들의 지시에 따라 집단처형이 이뤄졌을 개연성이 높지만 관련 증거자료는 없다고 소개했다. 한편 민간인 집단처형에 대한 미국의 책임여부를 놓고서는 찬반양론이 팽팽한 상태가 이어졌다. 당시 대전에 주둔했던 미군 자문관 프랭크 윈슬로(Frank Winslow.81)는 '칠면조 사격'(Turkey Shoot)으로 불렸던 처형장에 미군이 참여하긴 했지만 '한국인은 주권국이며, 모든 책임은 한국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한국전쟁 전문가인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는 '미국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전 학살극을 은폐했다'고 반박했다
아, 아, 지난 세월이 원망스럽다. 하지만 억울하게 돌아가신 넋들을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어서 그리고 도저히 진실을 밝히지 않고는 영령들을 뵈올 수가 없기에 참고 참고 또 참고 오늘까지 견디어왔다.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대전 산내학살 희생자위령제는 대전 중구 문화동 기독교연합봉사회관에서 치러졌으며, 4 ㆍ3유족들은 이 행사에 앞서 대전 골령골 현장을 찾아 위령제를 봉행하였다.
김 관 후
시인/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