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 식품의 보고, ‘우영팥’
도심지 주택가 응달 닭둥지 닮은 고추밭에 / 가을 햇살 부채질 하는 두어 마리 고추 잠자리 / 시골집 우영팥으로 깃을 펴는 저녁 노을 // 담뱃불에 덴 손가락 오줌항에 담그던 벗들 / 밀감나무 휜 가지를 주름살로 다스리고 / 감나무 여윈 가지에 낮 달로 뜨는 우영팥 // 사다 먹엄성게, 배추 상추 고추 마늘 / 싸락눈 내리는 날 와삭 바삭 먹던 무 / 조미료 길들여진 혀가 고향맛 다 잃었다.
어느 가을날 아파트 주변을 산책 하다가 빨간 고추가 익어가고 있는 조그만 텃밭에 고추 잠자리가 날아 다니는 풍경을 보면서 ‘우영팥’이라는 시 한 수를 얻었다. 시골집을 떠나서 구름처럼 떠돌면서 세상살이를 하다 보니 고향의 정취도 잊혀가고 고향맛도 잃어버린 실향민 신세가 되어 버렸다.
일 년에 한 두 번쯤 볼 일이 있어 편지처럼 고향집을 날아들면, 어린날 주머니에서 흘려 버린 두어 톨 꽃씨가 허기진 미소를 날리는 누이 닮은 꽃으로 피어 반길 뿐이다. 울담 위엔 포로롱 포로롱 참새들만 날아 다니고 등굽은 초가집 한 채와 늙으신 어머님의 마른 기침 소리가 고향집임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어린날 배가 고파 날 무를 뽑아 와삭바삭 먹던 우영팥엔 밀감나무 몇 그루가 지친 모습으로 감귤들을 새끼처럼 보듬어 안고 있을 뿐이다.
‘우영팥’은 제주도 민가의 외부공간의 한 부분이다. 제주도의 전통적 민가는 거의 초가집이었다. ‘우영팥’은 집의 양 측면이나, ‘안뒤’의 뒤 등 대지의 외곽지대에 위치한다. 집 주위의 채소 등을 심어 두는 공간, 즉 채마밭이다. 이 우영팥 에서는 계절따라 기른 채소들이 싱싱한 채로 밥상에 오른다. 배추는 물론이요, 무와 고추, 마늘과 부추, 감자와 호박, 오이와 가지, 강낭콩과 옥수수……, 구수한 천연적 식품들이 고향맛을 북돋우어 주었다.
봄이 되면 겨울배추 끝에 돋아난 어랑어랑한 동지나물 된장국이 밥도둑이 되고 여름엔 물외냉국에 다가 가지나물이며 날고추를 된장에 둠뿍 찍어 먹어 입안이 얼얼하던 맛, 거기에다 상추와 배추쌈, 가을이면 양하 삶은 것에다 토란국, 고추잎 버무린 반찬, 노랗게 익은 호박국이야 무슨 맛에 비기랴. 하얀눈이 내리는 날 무국에다 무냉채도 밥도둑이다. 그러니까 사시절 밥상에는 오로지 그린벨트 소위 채소뿐. 고기는 명절이나 제사때가 되야 겨우 눈동냥하는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런데 이런 천연식품들을 생산해 내던 우영밭이 사라저 버렸다. 돈이 되는 감귤나무들과 비닐하우스들이 황금채소들을 재배하면서 우영밭의 이름조차 기억의 뒤안길로 떠난 것이다. 시절은 변해서 대형마트들이 식품을 공급하는 시장이 되었다. 도시는 물론 농촌에서도 김치를 비롯한 채소들을 이런 곳에 가서 사다 먹는 실정이다. 문제는 농약으로 인해 유해식품이 논란이 끊이지 않는 다는 점이다.
건강을 위태롭게 한다고 야단법석이다. 그래서 가난한 시절에 먹던 보리밥이며, 채소들을 식단으로 내 놓는 식당이 생겨나 인기를 끄는 현상도 되살아 나고 있다. 소위 웰빙시대다. 잘먹고 잘사는 것이 시대적 화두가 되고 있다. 유기농 농사가 인기를 끌고 있다. 지금이야 말로 우영팥을 되살릴 때이다. 싱싱한 채소들을 스스로 길러 먹는 것이야 말로 오늘을 사는 지혜다. 도시민들의 주말 농장식 우영팥을 갖는 것도 고려해 볼 일이다.
시조시인 현 춘 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