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패의 정치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소위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이 입에 달고 하는 얘기가 있었다. “정말로 개혁할 곳은 정치와 언론”이라는 얘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 쪽 사람들에 의해 언론은 ‘언론개혁법’이라는 이름아래 현존의 정기간행물법을 뜯어 고쳐 내놓고 있다. 그것이 개혁이 될 것인지 아닌지는 앞으로 다가올 일이니까 봐야 할 것이지만 “과연 정치개혁,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그 개혁은 어떠한갚 하는 의문을 요즘 들어 부쩍 품게된다.
여권이 내 논 4대 개혁입법, 언론개혁법을 포함해 국가보안법폐지, 과거사규명법, 사학법개정을 정치개혁의 큰 틀로 본다면, 그 개념만은 체면치레에 모자람이 없다. 지금까지 잘못된 과거를 규명해 앞으로 이런 일이 없게 하고, 이런 일이 있더라도 관여된 사람들의 ‘출세’를 막겠다는 발상이니 누구나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다.
개혁입법에 숨겨진 의도와 遠謀
이 개혁입법의 정신이 부정과 부조리가 판을 치지 못하는 그런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인 데,이를 반대한다면 반대하는 사람들이 정신 나간 사람들로 매도당해도 할말이 없을 것인 즉, 개혁을 외치는 쪽에서는 왈가왈부 그 자체가 반(反) 개혁적이라고 하는 것도 일리는 있다.
러나 아무리 개념과 취지가 좋다 해도 그 과정과 속에 다른 의도가 숨어 있으면 그것이야말로 사익을 노리거나 사적인 원망(願望)이 숨겨진 ‘원모(遠謀)’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차원에서 진정 이것이 개혁입법이냐 아니냐가 천하논쟁거리가 되는 것은 반(反)개혁적이 아니라 진정한 개혁을 위한 당연한 순서다. 이런 법들이, 국민들에게 특정인 몇몇을 겨냥한 것이라거나, 사학재단에 죽게 살게 모은 재산을 출연한 사람들의 사유재산을 제약하는 것으로 비쳐지고 있다면 오히려 ‘개악’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얘기가 훨씬 솔깃하다.
개혁을 주장하는 정치권에 또 하나 크게 실망한 것은, 헌법재판소의 신행정수도이전특별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을 대하는 태도였다. 정치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원칙성, 일관성은 밥 먹듯 지녀야 되는 것이 적어도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 하는 모럴일 것이다.
지난 5월 대통령 탄핵시 헌재가 이를 기각했을 때 “민주주의를 수호한 헌법기관”이라는 찬사를 보냈다가 이번 신행정수도 위헌결정에는 “헌법을 훼손한 오만방자한 집단”이라고 싸잡아 비난했다면, 개혁이라는 지고의 가치가 ‘엿장수’도 주창할 수 있는 값싼 엿가락 값 정도로 전락하고 만다.
코미디 복사판이 돼 버린 정치판
국회에서 신행정수도특별법 통과를 협조해놓고 헌재의 신행정수도 위헌결정에 희희낙락하고 있는 것도 비난 받기는 오십보백보다. 자신에게 유리하면 찬사요, 불리하면 비난한다면 ‘자신이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식의 편견과 독선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4대 개혁입법으로 시작된 정치판의 ‘불안정성’은 신행정수도 특별법의 위헌결정으로 절정에 달하고 있다. 급기야 총리의 국회 시정연설 조차 야당이 보이콧하는 사례가 발생했다. 이 정도에서는 이제 정치판은 저질 코미디 복사판이 돼 버려 곳곳에서 ‘전면적 프로개편’을 외치는 시청자들이 늘어날 판이다.
동네여자가 바람났다고 소문내는 같은 동네의 아낙의 안방은 어떤지 살펴보는 것은 재미를 떠나서 동네의 화합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 무작정 그 소문만을 믿어 동네 처녀를 무고할 것이 아니라, 소문을 내는 아낙의 입장도 알아야 사건의 본말은 실체를 드러나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의 안방을 들여다보는 것이 앞으로의 개혁의 흐름을 감별해내는 감상법이 될 것이다.
국민이 병신이 되든, 죽어나든, 그저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그 집안부터 잘 들여다보는 것이 이제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에 가까운 국민들이 할 일인 듯싶다. 우리는 앞다리가 길고 뒷다리가 짧은 낭(狼)과, 앞다리가 짧고 뒷다리가 긴 패(狽)라는, 교활하기 그지없는 이리라는 동물의 넘어짐과, 당황함과 같은 정치, ‘낭패의 정캄 진수를 앞으로도 계속 감상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