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무고(誣告)는 사람을 죽인다
몇 년전 제주지방 경찰청 4층 대강당에 8폭 병풍이 있었다. 제주출신 서예가 古김광추 선생의 작품이다.
4면으로 된 시조내용을 보면 이러하다. 백두산석 마도진/두만강수 음마무라/ 남아 20미평국 / 후세 수칭 대장부/ 조선조 세조대왕 때 병조판서를 지낸 남이(南怡)장군의 시조와 누가 보아도 찬란하게 빛나는 문체다 그 문장이 그의 표정에 드러나듯 강한 기상이 뿜어나온다. 장군은 무관 출신이다.
그 나이 26세때 병권을 장악한 병조판서가 된 것은 조선 500년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나이에 기록을 깬 인물은 없다.
장군이 출세는 황족이 피가 흐르고 있다. 부친 남휘는 태종의 사위다.
태종의 넷째딸 정선공주와 결혼하여 남이가 장남이다. 그는 17세에 무과에 급제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19세 때에는 이시애의 반란이 일어나자 출전하여 용맹을 떨쳤다.
그이후 여진족을 정벌 할때에도 선봉으로 적진에 들어가 큰공을 세웠다.
이공으로 적개공신 훈1등에 책록되어 26세 나이로 병조판서가 되었다.
小學에 보면 부친의 공으로 출세하거나 젊은 나이에 무거운 중책을 경계했다. 딱 들어 맞았다.
세조가 돌아가고 예종이 등극하자 이조판서 한계희는 종실이나 외척에 병권을 주는 것은 부당하다고 탄핵했다.
이를 빌미로 유명한 간신 유자광(柳子光)의 무고가 일어났다.
예종이 즉위하여 얼마안되어 혜성이 나타났다.
어느날 밤 궁중에 숙직하고 있던 남이가 혜성이 나타나는 것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이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
이말을 옆에서 듣던 유자광은 말을 돌려쳐서 남이가 역모한다고 예종에게 보고했다.
선왕때부터 남이를 못마땅히 여기고 있던 예종은 이것을 기화로 남이를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이사건에 관련된 사람중에 영의정 강순(康純), 조경치등 7명이 지목됐다.
이들은 서로 모의하여 왕이 산릉에 행차할 때 거사하기로 했다.
공하면 보성군 이합의 아들 춘양군을 추대하려고 했다고 꾸며 단죄하여 모두 죽였다.
사대사화 이전에 일어난 무고사건은 참담했다.
이 사건을 살펴보면 화(禍)의 근원은 입이다. 남이를 일컷는 말이다.
적자인 유자광은 출세하기 위해 남이를 무고했고 결과는 성공했다.
이사건이미풍이라면 어마어마한 태풍도 있다.
무고의 원흉인 유자광은 무오사화의 주연으로 등장하였다.
연산군 4년 조의제문을 문제삼아 정적들에게 제단에 피를 뿌린자다.
그도 말년에 귀양가 장님이 되어 배소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왕조시대에 옥사가 일어나면 무고의 덫에 걸려 죄없이 당한자가 있다.
바로강순이다.
남이가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을 때 유자광의 무고라는 것을 알고 있던 강순이 남이가 모반이 아니었다고 변론했다면 혹시 목숨을 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강순은 고개를 돌리고 침묵했다.
결국 강순을 물고늘어져 그 역시 처단됐다.
그후 1년후에 누명은 벗었지만 집안은 멸문지화가 된 후였다.
강순보다 운이 좋은 사람은 남이의 장인 권남(權擥)이다.
그는 뇌물을 밝혔고, 매관매직하면서 축재에 힘썼다.
사치가 대단했던 그는 세조 11년에 사망했다.
그리고 남이 처 권씨도 26세에 병사했다. 무고의 난 이전에 사망한 이들은 남이의 험한 꼴을 보지 않았다.
무고로 참수된 남이나 음모와 암투의 경쟁속에 한때 부귀영화를 누렸던 유자광도 각자 주어진 운명일지도 모른다.
나는 묘지에 잠들어 있는 남이를 깨워 다시 심판대에 올려 놓으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조를 보듯 남아 20미평국은 20세에 참수당했고 후세수칭 대장부는 역적의 수괴로 둔갑되어 기억속에 남아 있지만 그 억울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살인자와 도둑은 사람의 도리를 모른다.
무고 역시 멀쩡한 사람의 가슴을 헤집어 소금까지 뿌리는 인간은 사람이 아니다.무
고는 예나 지금이나 우릴 죽인다.
송 순 강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