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문화권력’과 제주문단
문화권력은 문화예술 활동으로 얻은 명성으로 사회 전반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개인과·집단을 말한다.
그렇다면 문화권력에 속한 문인권력은 작가들의 영향력이라 할 수 있겠다.
과거 문인의 힘은 윤리적, 도덕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상징적 권위를 누렸다.
시국사건 때마다 문인들은 항상 시대의 전위에 있었고, 시인의 언어는 민중을 구원할 상징적 권위를 부여받곤 했다.
그러나 대중문화의 성장으로 문학이 절대적 지위를 상실하면서 문인권력은 문화지식인의 권력으로 대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아직까지 한국에서 문인권력을 이용해 정치권력과 네트워킹하는 행위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다.
그러나 미국이나 유럽을 보자. 문인들이 정치적이어서, ‘나는 사회당이다’ ‘나는 우파다 또는 좌파다’라는 의식이 명확하다.
정부가 추진하는 문화는 풍성한데 작가의 예술은 허약하고, 정부가 추진하는 문화행사에는 대규모 예산을 쏟아 붓는데 작가는 생존마저 위협 받고 있다. 제주도의 실정은 더욱 심각하다.
제주출신 작가들의 책은 팔리지 않고, 동인들은 끼리끼리 자화자찬하는 판이 된 지 오래다. 문학을 한다는 명사들은 많은데 혼을 가진 쟁이는 보이지 않고, 그래서 자조적인 평가도 있다
"제주도에서는 안 돼. 중앙으로 나가서 인정을 받아야 해." 이에 따라 비평문화는 사라진지 오래고, 작가는 지방신문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는 만족한다.
비평계는 있는지 없는지, 실사비평은 사라진 지 오래고 젊은 작가들은 자기가 최고인양 책을 출판하지만 반응은 별로다.
그렇지만 문인은 쏟아지고 있다. 제주문협 회원만 2백명이 넘은 지 오래다.
덩달아 제주문단은 참여 대 순수, 진보 대 보수라는 제주작가회의의 『‘제주작가』와 제주문인협회의 『제주문학』의 대립구도로 양분되었다.
그렇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제주작가회의에도 순수를 지향하는 문인들이, 제주문인협회에도 진보를 지향하는 문인들이 보인다.
그렇지만 두 단체는 분할되고, 제주사회에서 문학시장의 주도권을 누가 잡는가에 집중하면서, 누가 문단권력을 휘어잡는 가에 쏠려있다.
두 집단의 대화는 그냥 희망사항일 뿐이며, 그냥 그렇게 흘러갈 뿐이다.
그렇지만 문단권력은 문단활동으로 얻은 명성으로 제주사회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개인들이 존재한다.
신문에 칼럼을 쓰거나, 지방정부가 추진하는 무슨무슨 위원회에 이름을 올리면서, 그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언급대로 문화권력은 ‘전복’과 ‘배제’의 규칙이 작용한다.
문화권력의 장은 서로 같은 입장을 가진 자들이 만든 구조적 공간으로서 장을 유지하기 위한 배제의 논리와, 그것을 깨기 위한 전복의 논리가 치열하게 경합을 벌일 뿐, 애초부터 동일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념적으로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자신들이 장을 지키려는 문화권력의 속성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제주문단이 그 속성을 닮은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제주도의 예총과 민예총의 대립구도라는 낡은 정치적 시선에 휩싸였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그 대립구도를 풀기위한 구체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행정당국은 문화예술계가 납득할 수 있을 폭넓은 의견을 수렴하고 4__3행사는 민예총, 탐라문화제는 예총이라는 이분법적 방식에서 탈피하여야 한다,
오히려 행정당국이 문화권력을 휘두르고 있지 않은지 반성하고, 문화예술계도 행정당국에 매달리는 행위는 삼가야 할 것이다.
참여정부 시절 ‘서울대 미학과’ 출신이 문화권력으로 부상하여 문화예술계의 책임자 자리에 잇따라 임명되었다.
이들의 약진에 대해서 ‘능력에 걸맞은 평가’라는 긍정론과 ‘참여정부와 코드가 맞기 때문’이라는 부정적 시각이 엇갈렸다.
이것은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문화계의 권력은 저항정신과 반골 기질을 가진 ‘삐딱이’ 미학과 출신들과 코드가 맞은 것이라는 것이 지금의 일반적인 평가이다.
그렇지만 지방에서 활동하는 문인들까지 ‘특정한 이념을 추종한다는 이유’로 서로 등을 돌리면서 제주도의 문화판을 갈라놓는 지금의 행태가 오히려 더욱 씁쓸하다.
김 관 후
시인/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