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기러기 남편

2009-02-23     제주타임스


며칠 전 믿음직한 남편이자 다정한 아버지로 인정받는 후배들과 저녁식사를 하다가 ‘로또에 당첨이 된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로 이야기가 흘렀다.

직장에 바로 사표내고, 좋은 저택마련하고, 멋진 차 한대 뽑고, 보디가드도 고용하고......‘같은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중에 그래도 제일 안정된 축에 있다는 한 후배가 낮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당첨금은 다 가족에게 줘서 잘살게 한 후 나는 혼자서 멀리 떠날 거야’ 놀랍게도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이 후배들은 이 말에 가슴의 떨리는 심정으로 동의하는 표정들이었다.

가족 보살피느라 자기인생의 의미 같은 건 잊어버린 지 오래되었으며 가슴이 답답해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운다는 후배도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도대체 이 모범적인 가장들을 멀리 홀로 떠나가고 싶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요즘은 남편들은 사랑하는 아내 자식들이 힘에 부친다.

그래서 홀로 기러기가 되어 둥지로부터 멀리 떠나고 싶고, 가족으로부터 왕따 된 남편이 기러기 남편이란다.

똑같은 돈의 액수를 시장에 들고 가도 절반밖에 채우지 못한 장바구니에 울상을 짓는 아내는 좀더 나은 봉급을 기대한다. 

자식에게 기대기가 미안한 연로한 부모님은 무슨 일이든 ‘난 괜찮다’  하신다.

생존경쟁에 허덕이며 교육시키고 구김살 없이 키우려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사춘기 자녀들은 ‘우리가 아빠를 정말로 필요로 할 때 어디에 계셨나요?’하고 입을 삐죽인다.

남편들은 모든 게 자신의 잘못 같다.

조금 더 젊었더라면, 조금만 더 능력이 있었더라면, 조금 더 실력이 있었더라면 하고 후회로 밤을 지샌다. 

‘사회 안전망’이라는 말이 있지만, 아직까지 우리 현실에서는 실감나는 말이 아니다.

사회의 안전망은 가정의 가장인 남편이 지탱하고 있다.

과중한 교육비, 장애와 빈곤, 경제의 어려움 등등 심각한 문제의 상당부분은 가정의 가장인 남편의 안간힘을 쓰며 맡아야한다.

힘들 때 힘이 되는 건 가족뿐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정작 가장이나 남편이 입장에서는 따뜻하기 보다는 오금을 춥게 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장애 있는 자녀양육, 학원 비 감당에 너무 힘들어 동반자살을 하는 남편들도 생긴다. 요즘 시류가 여성상위 시대이고, 소년소녀상위시대다.

부인을 아녀자라고 하던 한 30년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가정문화가 만들어 지고 있다. 

 제주시 어느 여자고등학교 교장을 지낸 친구의 말이다.

요즘학생들은 카메라, MP3 등등 잃어버린 꽤 값나가는 물건을 찾아가라면 대부분 학생들은 찾아가지 않고 새로운 것을 산다고 한다.

남편들은 직장에서의 어떤 어려움도 아내와 자식을 지켜내야 한다는 대명제 앞에서 가족에 대한 헌신가정문화의 산물이다.

작년 통계연보에 따르면 1인당 교육비가 1억원을 넘었으며, OECD국가 중 우리나라가 사교육비 지출1위란다.

그리고 노동시간도 1위다. 이에 따라 남편들은 가족을 위해 이전보다 더 오래 일해야 하고, 구조조정으로 직장에서 잘리지 말아야 된다.

이래서 노심초사 직장에서 밤낮을 보내다 자신에게 권고 퇴직이라는 운명의 벌이 닥치면 아내와 자식을 볼 면목이 없어 노숙자로 전락하고 있다.

어느 문인의 산문집에서는 40대 직장 남성들이 우울증이 아닌 ‘우울하지 않은 척 증(症)’을  앓고 있다는 글을 읽었다.

돈이 없어 아이들을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공부시키지 못하는 아버지와 남들이 다 보낸다는 조기유학을 보내지 못해 아내에게 주눅 든 남편들은 스스로 좋은 가장이 되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어깨가 점점 더 처진다.

우울하면서도 우울하지 않은 척, 힘들면서도 힘들지 않은 척 해야 하는 이 땅의 남편들과 아버지들이 문득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곳곳에서 ‘경제 한파를 이겨내자’ ‘일자리를 만들자’ ‘일자리를 나누자’고 외친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은 이 땅의 남편이자 아버지들이 지나친 부담을 벗어버리고 신나게 뛰도록 해줘야 한다.

퇴근길에  삼겹살과 소주를 앞에 놓고 한숨을 내쉬며 이 땅에 태어난 것을 원망하는 남편들에게 어떤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어야한다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  

김  찬  집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