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風雲 인생사' 쓸 터"

재불 김양희 박사의 '황혼 서사시'

2004-10-18     정흥남 기자

잿빛 하늘에서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린 지난 13일 프랑스 북부 세느강 인근의 한 호텔 앞.
백발이 가득한 한 할아버지가 자매결연 조인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곳 루앙시를 방문한 제주시 관계자 등을 환한 얼굴로 맞았다.

타 민족, 특히 아시아 지역에 배타적이기로 소문난 프랑스의 지방자치단체(루앙시)를 설득해 제주시와 자매결연을 성사시킨 숨은 공로자 김양희 박사(75․주불 한국대사관 노르망디 지방 명예대사․루앙 국립대 사회학 한국사회문화 연구소장).

△슬픈 역사 이야기

“할아버지가 일제 때 도의원과 도지사를 지냈다는 이유로 ‘친일인사’에 분류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분명 사형위기에 처했던 백범 김구 선생을 구한 것을 비롯해 애국운동도 많이 했다”

김 박사는 자신의 할아버지(김원정.1948년 타계)의 ‘기구한 운명’에 대해 이같이 말문을 꺼낸 뒤 그동안 수집된 자료 등을 토대로 했다면서 얘기를 시작했다.
1895년 8월 20일 새벽 일본은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급습, 고종의 왕비인 민비(1897년 명성황후로 추대)를 시해하는 이른바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이 사건이 벌어진 이듬해(1896년) 청년 김창수(백범 김구 선생의 초명)는 민비를 살해한 일본군 밀정을 살해, 살인 등의 혐의로 붙잡혀 재판 및 범죄인 수용시설 이었던 인천감리소에서 1897년 사형선고를 받았다.

1895년부터 인천 감리소에 교무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김 박사의 조부는 당시 알렌 주한미국 공사를 통해 고종을 끈질기게 설득, 사형집행 직전 김구 선생을 극적으로 구조(사형연기)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김 박사 조부는 이듬해인 1898년 3월 7일 김구 선생을 탈옥시킨 뒤 그해 3월 23일 미국으로 도피했다.
김 박사의 조부는 이후 1904년 10월 주미 워싱톤 참사관을 역임한 뒤 1905년 5월 6일 워싱톤 공사관에 임명됐다.

김 박사의 조부는 이 과정에서 1905년 1월 우남 이승만을 조지 워싱톤 대학에 등록시켜 장학금을 받게 해 뒷날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생활 터전을 마련했다.

△바람과 물결과...

1890년대 후반기를 ‘긴박하게’ 보낸 김 박사의 조부는 일제 강점기가 본격화 되던 1914년 전라도 도의원을 역임했으며 1924년부터 1925년까지는 충청북도지사를 역임하게 된다.
김 박사의 조부는 1948년 해방직후 타계했다.

김 박사는 조부가 일본 총독부 통제시절 관직을 했다는 이유 등으로 ‘친일 인사’로 분류된 것은 모순이라면서 나름대로 수집한 자료 등을 토대로 재조명하기로 했다.
김 박사는 이의 일환으로 을사조약 체결 100주년이 되는 내년 발간목적으로 ‘할아버지 인생사’를 만들기로 했다.

김 박사가 현재 구상중인 책의 큰 제목은 ‘바람과 물결과 싸우면서’, 부 제목은 ‘을사조약 1000년-숨은 역사 이야기’로 잠정 결정했다.
김 박사는 1950년 한국전쟁 때 프랑스 파병군 통역관으로 활동하면서 프랑스와 인연을 맺은 뒤 1953년 프랑스군이 철군할 때 이들과 함께 프랑스로 가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김 박사는 파리 언어청각 임상센터 언어 치료 부원장과 한국 어린이 육영회 치료교육 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김 박사는 각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우리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은 것을 비롯해 프랑스 최고 국가 훈장인 ‘레지옹 돈오르’를 받기도 했다.

김 박사는 “제주시와 루앙시간 자매결연 조인식을 계기로 앞으로 두 도시간 각 분야에서 내실 있는 교류.협력이 이뤄지기를 기대한다”면서 제주시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역사는 어떠한 경우에도 어느 일방의 입장에서 감정적으로 또는 권력의 입장에서 쓰여져서는 안된다. 1905년 을사조약에 따라 자의반 타의반으로 살아야 했던 당시의 슬픈 모습들을 기록하겠다”
팔순을 목전에 둔 손자의 이 같은 다짐을 알기나 하듯 세느강은 소리 없이 대서양으로 굽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