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망증

2004-10-16     고창일 기자

제주 산악인 고(故) 고상돈씨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 정상을 밟은 에베레스트산이 있는 히말라야 산맥에는 희한한 새가 존재한다.
'도도새'라는 것으로 이 새는 밤만 되면 구슬프게 우는 게 특징이다.

누가 그 새의 속을 들여다 본 것은 아니지만 알려진 대로라면 히말라야 산맥의 극심한 밤 추위를 이기지 못해 내는 소리라고 한다.
이 새는 '내일 아침에는 집을 지어야지'를 수 없이 반복하면서 뜬눈으로 밤을 새운다.

이윽고 아침이 밝아오고 따스한 기운이 몸에 스며들면 도도새는 지난밤을 까맣게 잊는다.
하루종일 먹이를 찾아다니고 놀다가 땅거미가 질라치면 집을 짓지 않은 자신을 원망하면서 춥다고 다시 우는 모습을 일생동안 연출한다는 것이다.

최근 열매솎기에 이어 비상품감귤 단속 등으로 제주도 농정당국이 분주하다.
풍작으로 감귤가격이 폭락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탓이다.
도도새가 추운 밤을 맞은 셈이다.

그러나 아침이 밝아오면, 말을 바꿔 내년 적당 물량이 생산된다면 도도새가 집을 짓겠다는 각오를 잊듯이 제주도 농정당국도 느긋해지고 만다.
이는 제주도에서 감귤산업이 전개된 이후 매년 되풀이된 광경이다.

지난 15년간 무려 7000억원이라는 관련 예산을 쏟아 부으면서 각종 대책 마련, 용역발주, 연구결과발표 등을 거듭해 온 반면 결과는 15년전이나 진배없다.
숱한 연구.용역 결과 등이 어느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잠을 자는지 궁금하다.

또한 실천에 옮기지 않을 연구 및 용역 결과가 왜 필요했는지도 아리송하다.
제주도의 생명산업이라 예산은 눈에 띠게 배정해 놓아야 하고 막상 쓸데는 없고 그래서 이 돈을 너도 나도 나눠 가지면서 겉으로는 도도새처럼 '추워서 큰일났다'고 울어대지는 않았는지 되 새겨 볼일이다.

김태환도지사는 이 달 초 관계관에게 "올해산 감귤처리에 문제가 생기면 알아서 하라"고 단단히 다짐을 뒀다.
하지만 당장 추운 올해만 문제가 아니다.
감귤은 내년에도 또 내후년에도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