諸葛孔明

2004-10-14     김계홍 논설위원

삼국지를 보면 제갈량(181-234)은 자가 공명으로 산동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시골에서 은둔자적하며 살다가 조조에게 쫓긴 유비란 통찰력을 갖춘 인물에게 발견되어 그의 부하가 되면서 20년 동안 촉한의 재상으로 큰 업적을 남긴 유명한 정치가이다.

그의 전쟁 출사표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라는 명문장으로 전해진다. 삼국지에 나오는 적벽대전은 조비가 거느린 대군을 물리친 역사적인 전쟁으로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유비는 ‘촉한’이란 새 나라를 새운다.

▶제갈량은 머리가 뛰어나고 총명하여 부하를 잘 다스리고 근검ㆍ청렴하며, 내외정책도 잘 새워 성공한다. 그의 추종을 불허하는 리더십은 후세의 표본이 되었다. 사랑하는 부하를 ‘읍참마소’로 유명한 일벌백계의 형벌은 통솔의 표준이 되었다. 그의 전략이나 전술은 신기에 가까웠다.

유비가 죽고 그의 아들 유선이 즉위하자 여섯 번째의 북벌계획을 새워 출사표를 왕에게 바치고 출정을 한다. 결국 유비가 없는 전장의 진중에서 병사를 한다. 문제는 훌륭한 전략가요 문필가이며 충신이지 전장의 명장은 아니란 사실이다. 전쟁개시에 너무 신중하고 공격의 요체인 기습작전을 싫어하는 수비형 전법이 공격에서는 분리하였다. 촉한은 끝이 나고 조조의 나라 ‘위’에 병합이 되고 만다.

▶반대로 조조는 동탁을 척결하고 한 황실을 장악 중원을 차지하면서 위나라의 왕이 되고 화북지방마저 통일 중국통일의 바탕을 마련한 전장의 영웅이요 패가 없는 명장이다.
그런데 역사는 그를 간웅으로 폄하하고 제갈량은 왕도 아닌데 중국사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가이다. 시골에서 명상이 되는 극적인 인생, 어려운 여건을 호전시킨 전략전술, 유비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수 있는데 욕심을 버린 의리가 조조와는 달랐다.

정통성을 중시하고 지킨 역사관, 지덕을 겸비한 지도력으로 난세의 중화를 이끈 것이 타의 표본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나관중이란 저술가가 제갈량의 진실을 바르게 쓰고 많은 독자를 얻었기 때문이란 평가도 가능하다.

▶한 인물의 유명세는 그의 직위의 높낮이가 아니라 세상에 얼마나 영향을 끼친 공적에 공감을 얻는 정도가 좌우한다는 사실이다. 어려운 오늘의 난세에 처하면서 공명과 같은 지도자가 그리워지는 것은 필자의 사념(思念)만은 아닐 것이다.

김 계 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