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상록수’를 다시 읽다

2009-01-08     제주타임스

꿈 많던 중·고교 시절, 학교 도서관(실)엘 꽤나 부지런히 출입하였다.

여러 종류의 책을 보았지만, 그중에서도 한국문학의 소설류를 탐독하였다고나 할까. 특별히 무슨 목적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재미가 있어 닥치는 대로 읽었다고 표현해야 옳을 성 싶다.

 김동리 김동인 이상 현진건의 단편을 위시하여 염상섭 이광수 황순원의 장편을 섭렵했던 생각이 난다.

1958년엔가는 파스테르나크(구소련 작가)의 ‘의사 지바고’가 노벨문학상을 받게 돼, 그 번역서가 재빠르게 나왔다.

그런데 러시아 사람들의 이름이 어찌나 긴지, 세로 한줄 전체가 인명(人名)으로 채워질 정도였다.

 딱딱하고 지루해서 결국은 완독을 하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 두어야 했다. 불행하게도 파스테르나크는 독재 권력의 압력에 의하여 수상을 포기하고 말았다.
 ‘삼국지’도 읽었다. 당시 서울신문사에서 발행한 10권짜리가 있었는데 그 책 말미에 ‘삼국지는 10회 이상 읽지 말라’는 경구(?)가 있어, 아홉 번만 독파하였다.

 열 번 넘게 읽은 사람은 권모술수에 능하여, 남에게 해(害)를 입힐 수도 있기 때문이란다. 지금까지도 뚜렷이 기억에 남는 도서가운데 하나가 심훈의 ‘상록수’다. 오래 전 일이기는 하나, 어쨌든 감명 깊게 보았던 것만은 확실하다.

 최근 들어 어린 나이에 보았던 서적들이 떠오르면서 ‘상록수’를 다시 읽었다.

상록수의 두 남녀 박동혁과 채영신. 비록 소설이긴 하지만, 암울했던 일제치하의 농촌을 구제하기 위하여 선각자적인 행동을 실천으로 보여 준 주인공들이다.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구호아래, 그 어떤 난관도 우리들 자신의 노력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능동적인 자세와 자주정신을 심어준 애국자들이다.

특히 이 소설이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주는 것은 실제 인물을 모델로 했다는데 있다.

즉, 박동혁은 경성농업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내려와 농사개량과 문맹퇴치운동을 벌이던 심훈의 장조카 심재영의 ‘대역’이고, 채영신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경기도 산골에서 농촌운동을 하다가 과로로 숨진 최용신의 ‘분신’이라는 말이다.

보통학교도 가기 어려웠던 일제강점기에,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이 자기 몸을 불사르며 꿋꿋하게 농촌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은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또 다른 교훈을 주고 있다 할 것이다.

 ‘상록수’의 주인공과 같은 한 여성이 있다. 사계보건진료소의 김영순 소장이다. 그는 1년 남짓 동안에 한 마을 부녀자들의 의식을 완전히 바꿔놓은 ‘현대판 상록수’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저녁, 사계마을 30대의 젊은 주부에서부터 70대의 할머니들이 한데모여 기합소리도 힘차게 ‘기공체조’를 한다. ‘댄스스포츠’와 ‘탭댄스’도 익힌다. ‘밭일’과 ‘물질’로 바쁘고 고단한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스트레스와 만성피로를 해소하고, 특히 부인병과 치매예방에 효과가 있다는데 이보다 더 좋은 건강비법이 어디 있겠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수줍어하기만 하던 시골 부인네들이 지금은 그 어디에도 당당히 나설 수 있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그야말로 일거양득이다.

처음에는 서먹서먹해 하던 아주머니들이 김소장의 적극적인 활동과 열정적인 지도로, 이제 희망에 찬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김영순 소장은 20여년을 오로지 주민보건을 위해 몸 바치고 있는 6급 공무원 간호사이자, 문단에 정식 등단한 시인이다.

감기·설사·복통 등 1차 진료대상 환자와 노약자들을 따뜻이 보살핌은 물론이고 기공체조지도자 자격을 비롯한 양호교사·사회복지사·레크리에이션지도자·웃음치료사 등 각종 자격증을 획득, 이를 모두 주민건강 증진에 활용하고 있다.

이밖에도 김소장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아예 근무지인 사계리에 거주하면서 경로당과 일반가정을 수시로 방문하여 상담과 진료를 병행하기도 한다.

50대 중반인 그가 이토록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 봉사할 수 있는 것은 측은지심(惻隱之心)의 ‘희생정신’과 타고난 ‘문학적 감성’이 밑바탕이 되고 있을 터이다.

각박하기만 해가는 요즘의 세태 속에서, 김영순 소장을 ‘현대판 상록수’라 칭하여도 지나침이 없다 하겠다. 

溪山 이 용 길
전 제주산업정보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