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호 칼럼] '遺憾'이 정말 遺憾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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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이 당선자 신분으로 있을 때다. 당시 대통령직 인수위에서 언론계에 희한한 부탁을 했었다.
‘대통령 당선 자(者)’라 쓰지 말고 ‘대통령 당선 인(人)’이라 써 달라는 것이었다.
몇몇 신문들은 이를 충실히 따랐다. 오랜 세월 ‘당선자’로 써 왔던 전례를 깨고 이명박 당선자를 ‘당선인’으로 바꿔 썼다.
바로 그 몇몇 신문들이 이명박 정부의 비위를 맞추기 시작한 것은 아마 이 때부터인 듯하다.
‘당선자’든, ‘당선인’이든, 둘 다 틀린 것이 아니다. 어느 것을 쓰더라도 모두 맞다. 법률 용어로서도 그렇다.
헌법 67조에는 ‘당선자’로, 대통령직 인수에 관한 법률 등 일부 하위 법령에는 ‘당선인’으로 표기 되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대통령직 인수위가 이것을 모를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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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인수위가 굳이 ‘자(者)’ 아닌 ‘인(人)’으로 써 달라고 요청한 것은 뭔가를 잘못 알았거나, 아니면 아부 때문일 터다. 하기는 ’자(者)‘는 ‘놈’이므로 대통령 당선자가 ‘대통령에 당선된 놈’이 될까 황공해서 그랬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성직자는 성직 놈이고, 교육자는 교육 놈인가. 성자(聖者)는 어떻고, 철학자는 어떤가. 이들도 모두 ‘놈’인가. 아니다 ‘자(者)’는 놈이란 뜻과 함께 사람이란 뜻도 갖고 있다.
표창장 등에 흔히 썼던 ‘상기 자(上記 者)’는 ‘위에 적은 놈’이 아니라 ‘위에 적은 사람’이다.
‘대통령 당선자’라 표기 했어도 이명박 당선자의 권위나 품위에 추호의 손상을 입지 않았을 것이다. ‘자(者)’와 ‘인(人)’은 같은 뜻으로도 쓰이기 때문이다.
우리 정계, 우리 공직 사회에는 ‘말의 유희(遊戱)’들이 너무 풍미하고 있다.
이를테면 ‘유감(遺憾)의 남발’도 그것이다. 잘못을 저지른 국회의원, 장관, 그 외 고위직 인사들이 국민들로 부터 혹은 특정 당사자들로부터 사과 요구를 받을 때가 있다.
이 경우 일정기간 뜸을 들인 뒤, 하라는 사과는 하지 않고 “유감스럽다”는 ‘말의 유희’로 슬쩍 넘어 갔던 게 지금까지의 예다.
유감스러운 것은 도리어 국민이요 특정 당사자들인데 사과할 사람이 유감스럽다고 한다. 주객의 전도다.
‘당선자’를 ‘당선인’으로 바꿔치기 한 것도 ‘말의 유희’들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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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로부터 사과를 요구 받은 이명박 대통령도 9일 국무회의에서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대통령은 경찰청장에게는 불교계를 직접 찾아가 사과하라“고 지시 했다.
경찰청장이 사과를 할지, 유감 표명을 할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다.
대통령의 유감표명과 경찰청장에 대한 사과지시는 종교 편향 논란으로 불교계의 반발을 산데서 비롯되었다.
지난 7월 29일 경찰이 조계종 총무원장이 탄 승용차를 검색한 것이 직접 도화선이었다.
불교계로부터 사과를 요구 받은 지 40여일 만에 이명박 대통령이 어렵게 입을 열었지만 그것은 유감 표명이었다.
당사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지는 아직 미지수다.
물론, 사과 요구에 유감 표명으로 대신한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 혼자만은 아니다.
전직 대통령들도 그랬다.
그러나 이번 이명박 대통령이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 한다”는 말 대신 통 크게 “사과 한다”라는 말로 바꾸었더라면 불교계의 생각은 더 달라질 줄 안다.
설사 잘못이 없더라도 유감스럽다는 말쯤이야 누군들 몇 번을 못하랴. 한마디 말이 천 냥 빚을 갚는다 했다.
“사과 한다” 한마디도 그럴 것인데 말이다.
종교 편향 논란을 보면서 대통령이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 할 일인지, 불교계가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할 일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
‘유감(遺憾)’이 정말 유감스러울 따름이다.
김 경 호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