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월드컵경장은 말이 없는데…
용두사미(龍頭蛇尾).
이 말은 ‘시작은 좋았다가 갈수록 나빠 짐’, ‘처음 출발은 야단스러운데 끝장은 보잘것없이 흐지부지되는 것’ 등으로 즐겨 사용된다.
중국 송나라 시대 ‘벽암록’이라는 책에 처음 나오는 것으로 알려진 이 단어는 동양사 오랜 기간 사회 각 분야에서 어떤 사업이나 행위 등을 평가하는 잣대로 사용돼 왔다.
우리사회 회자되는 대표적 사자성어 가운데 하나다.
제주월드컵경기장 입주업체들이 경영난을 호소하면서 그동안 수면아래 머물러 온 월드컵경기장 운영을 둘러싼 불신의 골이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적자경영 원인이 서귀포시를 비롯한 행정의 미숙함과 이 곳을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대기업 프로축구 구단의 ‘통제’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입주업체들의 목소리가 거칠게 표출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거칠 것 없이 잘 나갈 것만 같았는데 갈수록 혼돈 속으로 빠지면서 새삼 용두사미라는 단어에 딱 어울리는 월드컵경기장이 된 것이다.
화려한 날은 가고
제주월드컵경기장은 제주의 자연과 전통문화를 조형화한 독특한 건축물이다.
새 천년을 향해 힘차게 항진하는 모습을 담은 경기장은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돼 있다.
진입로는 제주의 '올레'를, 경기장 형태는 제주의 '오름'을, 지붕모양은 '테우와 그물'을, 여섯 개의 기둥은 '5대양 6대주'를 표현하고 있다.
이런 때문에 제주월드컵경기장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축구장’으로 극찬을 받았다.
2002년 월드컵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른 뒤 적자에 허덕여 온 제주월드컵경기장은 2005년 경기장내에 영상체험관, 영화개봉관, 성문화박물관, 종합물놀이시설, 닥종이인형박물관 등이 잇따라 입주하면서 이용객이 늘기 시작했다.
2005년엔 첫 흑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으로 지어진 전국 10개 월드컵 경기장 가운데 서울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흑자를 기록했다.
2006년 2월 1일에는 제주도와 서귀포시, SK㈜가 협약을 맺어 제주월드컵경기장을 중심으로 스포츠를 통한 도민화합과 축구발전, 지역경제 활성화 등을 위해 프로축구단(당시 부천SK)이 유치됐다.
월드컵경기장에 제2의 부흥기가 기대됐다.
그러나 이 같은 외형의 화려함에도 지역경기 침체 등의 영향으로 관광객과 시민들의 발길은 줄기만 했다.
2004년 6월 60억원의 사업비를 투입, 월드컵경기장에 처음으로 입주했던 익스트림아일랜드사가 2년 만에 폐업하면서 제주월드컵경기장에 ‘분란의 싹’이 시작했다.
근본대책 내 놓아야
제주월드컵경기장 입주업체들은 2006년부터 지속적으로 서귀포시와 SK구단 등에 어려움을 토로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경기장 활성화 대책을 요구해 왔다.
입주업체들은 이곳에서 프로축구경기와 축제 등 연간 40일 이상 각종 대규모 행사가 벌어지면서 차량과 이용객 통제 등이 뒤따르는 바람에 막대한 손실을 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행정은 그러나 문제의 핵심을 잡지 못한 채 변죽만 울리고 있다.
‘조금만 참으면 된다. 대화로 풀자’는 말만 되풀이 하며 문제를 덮기에 급급해 한다.
실제 서귀포시는 이달 초 입주업체들의 기자회견을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라는 명분으로 취소하도록 해 불신을 자초했다.
문제의 본질을 찾아 치유책을 모색하는 것 보다 업체들의 주장이 자칫 ‘기업하기 좋은 도시’이미지에 역행할 수 있고, 이는 더 나아가 제주도정에 ‘부담’이 될 것으로 우려한 나머지 무리수를 끌어 들인 것이다.
민간기업의 내부 경영 문제를 시민들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행정이 자의적으로 판단, 대응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미숙함이 불신을 키우고 있다.
시민들의 공감대를 토대로 해법을 찾으려는 모습은 어디에도 볼 수 없다.
행정이 과연 누구를 위해 일하는 것이냐는 불만의 소리가 커지고 있다.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는 미봉책이 아닌 시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투명한 대책이 절실하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제주월드컵경기장은 그래서 말이 없어 보인다.
정 흥 남
편집부국장/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