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이타 사건을 아십니까?
인류 역사에서 폭력은 항상 존재한다. 그리고 평화는 우리 모두 희구해 온 가치였음에도 한번도 실현된 일이 없다. 1952년, 일본 오사카에서 일어난 스이타 사건에 주목하면서, 이 사건을 제주사에 당당하게 편입시켜 도민의 자존을 지켜나갈 필요를 느낀다. 이는 바로 제주출신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평화운동이고 반전운동이기 때문이다.
“군수송열차를 멈추면 우리동포 1천명을 살릴 수 있다”는 구호로 처음 불붙기 시작한 스이타 사건은 국내는 물론 제주에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 내 좌·우익 양측 모두에게서 버림받아 온 사건이다.
한국전쟁 당시 오사카 지역에서는“동포를 죽이는 폭탄을 만들지 말라”는 삐라가 나돌았다. 실제로 폭탄제조를 하는 중소기업들이 습격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사건에 참여했던 재일동포들은, 주로 사람을 죽이고 있는 것은 미군이다, 이북의 사람들도 이남의 사람들도 다 같이 피 흘리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동포들은 폭력은 싫지만, ‘재일(在日)’이란 그들의 신세가 안타깝다고 푸념하였다. 동포들이 만드는 폭탄이 ‘스이타 조차장’에서 조국으로 보내지고 있었다. 그걸 막으면 몇 백 명, 몇 천 명 한국인을 살릴 수 있다는 심정, 그 심정이란 단순한 반전운동이라기보다는 실제로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는 처절함이었다.
스이타 사건이 반전운동으로 확산되면서, 52년 6월24일 한국전쟁발발 2주년 기념일 전야제에 재일한국인과 학생 등 1천여명의 군중이 횃불집회를 열면서 열기를 더해갔다. 그들은 ‘군사기지 분쇄’‘군수수송 분쇄’ 등을 결의하고 밤새도록 시위행진을 벌였다.
시위대는 새벽녘 국철 철도차량의 조차장을 목표로, 조차장 내에서 군수 물자 수송을 위한 군임 열차를 부수려고 하였으며, 그러나 역에 대기하고 있던 경찰대로부터 탄압을 받아 많은 참가자가 부상당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현장에서 체포된 사람만 300명에 달하였다.
아직도 잘 알려지지 않은, 스이타 사건 진상을 추적하면서 지금도 생존하고 있는 재일동포 시인 김시종(金時鍾) 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인은 모친의 친정이 있는 제주도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4?의 피비린내 나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동료가 총격으로 죽는 장면을 보고, 지하에 잠입하여 밀항선으로 일본으로 도피한다.
그리고 일본에 도착하여 재일동포들이 한국 전쟁에 사용하는 폭탄의 부품을 만들고 있는 현실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는다. 시인은 군수수송 분쇄를 외치는 시위대에 참여하기로 결심한다. 시위에는 보통 3천명에서 1천명 정도가 참여하였으며, 제주출신은 대략 4∼5백명 정도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스이타 사건은 한마디로 ‘한국전쟁 반대’라는 목적을 품고 있었다. 시인은 미군정에 의해 강제 폐쇄된 민족학교 다시 세우기 위한 책임을 맡고 있었다.
평화의 과제는 전쟁의 위협이 없고 평화가 보장되는 미래사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의 문제로 결국 귀착된다. 평화가 보장되는 사회는 정의와 자유와 발전이 함께 존재하는 사회구조의 확립에서만 찾을 수 있다. 스이타 사선을 뒤돌아보며 외국 타향에서 한국전쟁을 막아보겠다던 동포들의 열정이 눈에 선하다.
김 관 후(북제주문화원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