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안녕하세요, 학부모님!

2007-03-27     제주타임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봄 같지 않다))’이란 말이 있습니다. 역대 중국의 4대 미인 중 한 사람으로 전해지는 왕 소군(王昭君)이라는 여인이, 북방의 흉노국(匈奴國) 왕에게 정략혼인으로 팔려 길을 떠날 때, 비파(琵琶)를 타며 부른 ‘단장(斷腸)의 엘리지’ 중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뜬금없는 중국 여인 이야기에 의아해할지 모르시겠지만, 요즘 학부모님들의 마음이, 꽃나무도 자랄 수 없을 만큼 추운 북방으로 떠나던 왕 소군의 삭막한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여겨, 드리는 말씀입니다.

요즘 최남단인 제주섬은 바야흐로 본격적인 봄의 향연을 앞두고 있습니다. 봄의 전령사인 매화와 목련은 이미 피었다 진 지 오래이고, 유채꽃 노란 물결이 해안도로를 따라 춘풍에 넘실대고 있습니다.

이처럼 온 누리가 봄의 온기와 활기로 가득한데, 학부모님들의 가슴에는 차가운 바람만 불어갑니다.

신학기가 시작되어 자식들이 학교에 입학하거나 학년이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도 기쁨은 순간이고, 앞으로 닥칠 공.사교육비 걱정에, 가슴 한복판이 황사가 낀 것처럼 서걱거리고 뻑뻑해지는 것입니다. 교복과 책가방, 참고서, 학습준비물, 급식비는 그래도 약과입니다.

고등학교 자녀의 공납금과 보충수업비, 학원 수강비 고지서를 받아들고 후들거리던 다리가, 천만 원에 육박하는 천정부지의 대학등록금 앞에서는 끝내 고목처럼 맥없이 꺾이고 맙니다.

그러나 머리를 쥐어짜도 뾰족한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마냥 손놓고 주저앉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결국 ‘생물학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의식주 비용외에 가용가계비는 모두 교육비로 ‘올인’할 수밖에 없고, 그도 안되면 빚을 얻을 수밖에 별 도리가 없습니다.

대개의 학부모 사정이 이렇다 보니, 봄이 왔지만 봄이 봄같지 않고, 어디 ‘상춘곡(賞春曲)’을 부를 엄두가 나겠습니까. 더 기가 막힌 것은 ‘잘난 정치인들’의 오불관언(吾不關焉)입니다.

입만 열면 공교육을 살리겠다고 온갖 ‘흰소리’를 늘어놓고, OECD국가 편입을 자신들의 치적이라고 생색을 내면서도, 정작 공교육비 투자는 OECD국가 평균의 40%, 미국에 비해서는 20%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초라합니다.

이처럼 공교육에 대한 투자가 국가예산의 우선 순위에서 뒤로 밀리다 보니, 교육의 질이 낮아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고, 상대적으로 학부모의 부담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서민 가정에서는 부실한 공교육을 벌충할 수 있는 사교육은 언감생심이고, 공교육비 마련에도 허리가 휠 정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반면 경제적 여유가 있는 가정에서는 유아기때부터 각종 사교육을 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아예 외국유학까지 시키고 있으니, ‘없는 집’ 아이들과 ‘있는 집’ 아이들 사이에는 교육의 기회균등이라는 기본원칙마저도 출발점부터 지켜지지 않고 있는 현실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서민들로서는 이래저래 자식들 교육문제만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이 태백’으로 회자되는 청년실업문제가 사회의 최대 현안이 되다보니,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과연 앞으로 내 한 몸 희생한 댓가로 자식들이 ‘우골탑’이라는 대학을 졸업하면 번듯하게 취업해 제 밥벌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못 배우고 가난한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 ‘동아마라톤’의 ‘이 봉주’ 선수처럼 인생역전 드라마를 연출할 수 있을까, 벌써부터 가슴이 바짝바짝 타오릅니다.

그러다 보니 금쪽같은 자식들 들을까 차마 내놓고 말은 못하지만, 새삼 ‘무자식이 상팔자’라던 선인들의 넋두리가, 학부모의 귓가에 살아나는 봄날 아침입니다.

고   권   일
삼성여고 교장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