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첫 번째 죽음
“복되다, 더없이 거룩한 뜻을 좇아 죽는 이들이여! 두 번째 죽음이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로다.”(프란치스코) 인용한 시에서는 첫 번째 죽음과 두 번째 죽음으로 구분하여 명상하고 있다. 복되게 죽는 이들을 해치지 못하는 두 번째 죽음, 그것은 저주요 파멸이요 비생명의 나락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음산한 그늘 속에 자기학대와 고통이 드리워진 지옥 같은 상황이다. 고귀한 생명력을 손상시키는 이런 죽음의 문화가 우리의 삶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극도로 오염되어 가는 자연환경은 시시각각으로 우리의 생명을 노리고 있다. 그리고 극단적인 물신주의, 이기주의, 찰나주의로 말미암아 생명 경시의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증오와 파괴와 죽음의 내용들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서도 쉽게 튀어나온다. 생명의 출산과 지속이라는 높은 가치도 쾌락과 욕망의 날름거리는 유혹 앞에 처절하게 허물어진다. 그리하여 출산의 기피와 낙태가 다반사로 행해지고 있다.
우리는 이 두 번째 죽음이 조작해내는 악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지혜를 갈망해야 할 것이다. 서두에 인용한 시의 ‘첫 번째 죽음’에서 이러한 지혜를 잘 체득할 수 있을 것 같다. 복되게 죽는다는 것은 복되게 살아온 결과로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13C초에 이탈리아에 살았던 프란치스코는 ‘형제애’를 설파하고 실천하면서 평생 살았던 사람이다. 그에게 있어서 형제애란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것이지만 거기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대자연,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사랑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그에게는 나무, 새, 물고기, 온갖 짐승들이 인격을 지닌 형제들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생태학자들이 자연보호를 위해 프란치스코의 지혜를 체득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프란치스코의 놀라운 면모는 죽음에 대한 그의 명상에서 드러난다. 죽음을 ‘언니’로 인격화하여 동반하던 그는 마침내 숨을 거두면서도 애인의 품에 안기듯 죽음을 끌어안았다. 그의 삶은 언제나 그의 죽음과 동행하고 있었다. “죽음은 / 네 속에서 다시 / 숨 쉬며 자라갈 것이다.”(김춘수) 거룩한 섭리에 따르는 첫 번째 죽음, 그것은 질서요 소생이요 생명의 활력임이 분명하다.
삶과 죽음은 생명의 가장 자연스러운 순환임을 우리는 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어김없는 진실인 것처럼 언젠가 죽으리라는 것도 만고의 철칙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철칙에서 벗어난 자유인이라는 착각이 항상 나를 노예화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다정한 이의 죽음 앞에서 몸을 떨기도 한다.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 툭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박목월) 죽음의 섭리를 곱씹으며 비애를 가슴에 묻는 목소리가 들린다. 훌륭히 죽기 위해 훌륭히 살기를 배우라는 말이 있다. 복된 죽음에 대한 명상은 나에게 침범하는 온갖 악의 세력을 물리치는 힘을 제공할 것이다.
죽음은 여러 가지 말로 이야기할 것이다. 그는 기쁨의 소리도 가졌을 것이며 피 맺힌 눈물의 소리도 가졌을 것이다. 쓰러진 나무 등걸에서 돋아나는 새싹의 움직임 소리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생명의 하직이라기보다는 도도한 핏줄이 흐르는 만남인 것이다. 돌아가신 분의 장례식에 참례할 때가 종종 있다. 여기에 우리의 정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추모와 위로의 언어가 끈이 되어 우리를 잇는 정성이다. 때때로 금전과 규모에 붙들려 죽음을 손상시키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 영 환
전 오현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