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눈의 虛構, 생각의 虛構

2006-10-18     제주타임스

요즘 신문의 칼럼을 보며는 자신의 눈높이에서 판단하고 주장하는 내용들이 많다. 물론 맞는 말일 수 있으며 맞는 말들이다. 신문이나 TV에서 정치토론을 보며는 자신의 눈높이로, 자신의 생각으로 말의 결투를 벌인다. 물론 정치는 ‘말’을 가지고 하는 게임이라고 하지만 말이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에는 허구가 있게 마련이니까 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으로 세상을 본다. 예를 든다면, 자동차를 사는 날에는 길에 보이는 것은 모두 자동차뿐이다. 길 가는 모든 사람들의 운전하는 자동차만 눈에 들어온다. 다른 사람의 입장은 안중에도 없다. 신문을 봐도 자동차광고뿐이다. 미장원을 다녀오면 모든 사람들의 머리에만 시선이 집중된다. 그 외엔 아무것도 안 보인다. 그런가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누가 근처 문방구가 어디냐고 물으면 갑자기 멍해진다. 어디서 본 듯한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바로 학교 앞에 있는 문방구를 아침저녁으로 지나다니면서도 도대체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마치 그 집은 세상에 존재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사실 그렇다. 세상은 내 마음 끌리는 대로 있기 때문이다. 짝통 가짜명품도 그게 가짜인 줄 알 때가지 진짜 명품이다. 빌려온 가짜 진주목걸이를 잃어버리고는 그걸 진짜로 갚으려고 평생을 고생한 모파상의 소설, 어느 여인이야기도 이런 정신에서 비롯된다. 세상은 내가 보는 대로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있다고 다 보이는 것은 아니다. 있는 게 다 보인다면 대뇌 중추는 너무 많은 자극의 홍수에 빠져 착란이 된다고 한다. 이런 것들이 하느님이 인간에게 조심하도록 하기 위해 내린 계율인지도 모른다. 신나게 기분 좋은 아침엔 날마다 다니는 출근길도 더 넓고 명랑해 보인다. 그래서 휘파람이라도 절로 나오는 기분이 될 땐 슬픈 것들은 아예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달도 슬픈 눈에는 싸늘하게 보이지만 정다운 이와 함께라면 따뜻하게 보인다. 세상은 우리가 보는 것만 보인다. 해변에 사는 사람에겐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저녁 문득 바라다 본 수평선에 저녁달이 뜨는 순간, 아 그때서야 아름다운 바다의 신비에 취하게 될 것이다. “밤마다 뜨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라고 읊은 소월시인에겐 그때까지 달이 없었다. 세상은 내가 느끼는 것만 보이고, 보이는 것만 존재한다. 우린 너무나 많은 좋은 것들을 그냥 지나간다. 느낄 질 못하고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늘이, 별이, 저녁놀이, 날이면 날마다 저리도 찬란히 열려 있는데도 우린 그냥 지나쳐 버린다. 대신 우린 너무 슬픈 것들만 보고 살고 있다. 너무 언짢은 것들만 보고 살고 있다. 하지만 세상이 원래 어려운 것은 아니다. 어렵게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물론 쉬운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달라진다, 반 컵의 물은 반이 빈 듯이 보이기도 하고 반이 찬 듯도 보인다. 비었다고 울든지, 찼다고 웃든지. 그건 자신들의 자유요 책임이다. 다만 세상은 내가 보는 것만이 존재하고 또 보는 대로 있다는 사실만은 명심해야 되겠다. 내가 보고 싶은 대로 존재하는 세상이라고 생각하는 정치인들이 꽤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여당과 야당, 진보와 보수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말싸움을 한다. 그러나 정치만은 보고 싶은 것 뒤에 있는 진리를 찾아내어야 한다. 왜냐하면 정치의 실수는 그 대가가 엄청난 것이며 사람이 목숨이 한번인 것처럼, 정책의 집행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밝은 태양도 그 따스함을 느끼지 못하면 보이지 않는다. 비바람 치는 캄캄한 날에도 저 시커먼 먹구름 장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여유의 눈이 있다면, 아! 그 위엔 찬란한 태양이 빛나는 평화스러운 나라가 보일게다. 세상은 보는 대로 있다. 어떻게 보느냐, 그것은 자신들의 책임이다.

김   찬   집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