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기록(記錄)은 곧 역사

2006-09-25     제주타임스

중학교 때인지, 고등학교 시절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국어교과서에서 이하윤(異河潤)시인의 ‘메모광’을 공부했던 기억만은 확실하다. ‘아무 종이거나 닥치는 대로 메모를 하고 심지어는 밤에 잠자리에 들어있는 채로 시상이 떠오르면 어둠 속에서도 능히 적어 둘 수 있는, 그래서 잠시라도 메모를 버리고는 살 수 없는 광(狂)이 되고 말았다’는 줄거리의 짧은 수필이다.

그는 이러한 메모습관이 정리벽(癖)겮痴訓?막?발전되어 물심양면의 발자취로서, 소멸해가는 전 생애의 설계도로서, 자신의 인생 생활의 축도(縮圖)가 되고 있다고 설파한다. 그러면서 “쇠퇴해 가는 기억력을 보좌하기 위하여, 뇌수(腦髓)의 분실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만큼 메모 즉 기록이 중요하다는 것을, 재미있고 세련된 필치로 강조하고 있다.

 메모에 관한 한 토마스 에디슨을 따를 사람이 없다고 한다. 독서광으로도 알려진 에디슨은 일생동안 공책3천400권, 무려500만매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메모와 일기를 남겼다. 이 주인공이 1천300여점의 발명품을 낸 ‘발명왕’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무엇을 바탕으로 이처럼 세계적인 천재 발명가가 되었을까. 끊임없는 기록과 정보축적으로, 계속 두뇌를 자극시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기록은 이처럼 개인에게만 긴요한 것이 아니다. 정부는 물론이고 지방자치단체를 비롯한 각급 공사(公私)기관과 단체의 업무 중, 가장 막중한 과업에 속한다. 이를 처리하기위한 기구로 행정자치부 소속하의 ‘국가기록원’이 있다. 현 제주도 김한욱 행정부지사가 초대 원장을 지냈다(‘정부기록보존소’로는 27대 소장). 국가기록원은 ‘기록이 없으면 정부도 없다’는 구호아래 국가 기록물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이 기록물을 국가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안전하게 보존하며, 기록정보의 효율적인 활용을 도모함으로써 ‘세계 일류 기록국가’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 기록물이란 ‘문서ㆍ도서ㆍ대장ㆍ카드ㆍ도면ㆍ시청각물ㆍ전자문서 등 모든 형태의 기록정보자료’를 말한다. 그런데 지난번 감사원의 발표에 의하면 우리나라 첫 국새(國璽)와 대통령 결재기록들이 일부 분실되었고, 1948년 7월의 건국헌법 원본도 보존이 안 돼 있는 등, 국가기록 관리의 허점을 드러내고 있다.

종전의 정권들이 기록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유야무야 해버린 것인지, 아니면 저들의 부정이나 치부를 숨기기 위해 고의적으로 은폐했는지 모를 일이다. 기록, 특히 공공기록은 국민의 소유이다. 따라서 국민의 위임을 받은 공무원은 행정의 과정과 결과를 기록하고 보존하면서, 이를 국민에게 공개ㆍ설명하는 ‘설명책임성’의 기본정신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기록이야말로 곧, 역사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들의 제주특별자치도는 어떠한가. 참여정부는 개혁정책의 일환으로 ‘기록관리 혁신’을 내세우며 기록관리 시스템을 정비하고, 중앙부처에 기록연구사를 배치하고 있다. 각 지방자치단체에는 지방기록물관리기관(기록관)을 두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제주도에 기록관이 있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했다. 혹 도서관이나 박물관으로 하여금 이를 대행토록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본래의 목적과 취지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록 관련 전문가들은 지방자치는 ‘기록자치’나 다름이 없다고 하면서, 지방자치를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기록자치가 선행돼야한다고 주장한다. 기록을 통해 행정의 책임성과 투명성을 강화하고 지역주민들에게 유익한 지식정보를 제공하는 일이야말로 특별자치도가 해야 할 ‘특별’한 임무가 아닌가 한다. 개인이든 기관 ? 단체이든, 기록의 힘이 위대함을 깨달아야 할 시점이다.

이   용   길 (전 제주산업정보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