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호 칼럼] 대법원장 중심 지켜야
만약 기자가 대법원장이라면 판사들에게 딱 세 가지 말만 하겠다. “헌법과 법률에 의해 양심적으로 심판하라.” “인신 구속은 인권을 최대한 고려하라.” “정치 권력과 로비와 부정한 돈과 멀리하라.” 대법원장은 법원의 수장이다. 사법부는 판결로 말을 하는 기관이라는 점에서 수시 정책이 변하는 입법부와 행정부의 기능과 다르다. 법원은 법과 법률에 의해 민ㆍ형사 사건 등을 심판하고 사회정의를 지키는 보루의 역할만 하면 된다.
법관, 특히 대법원장이 평소 국민의 존경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법원장에 대한 국민의 존경심은 세계 각국이 동일하다. 민주주의를 지키고, 정의와 불의를 판단하는 사법부 정상(頂上)으로서의 높은 법률지식뿐아니라 고도의 인격과 품위를 지닌 사람들이기에 그렇다. 평소 대법원장이 법관들에게(사실상 국민을 향해) 말을 하지 않아도 국민들은 다 이해한다. 정책상 자꾸 국민을 상대로 말을 해야 하는 대통령이나 총리의 역할과는 엄연히 구분돼야 한다. 사실, 대법원장이 할 말이란 없다.
말을 아끼는 게 법관은 물론 국민들에게도 이롭다. 말을 많이 하면 오히려 혼란을 줘 법관들의 독립적인 판단만 흐리게 할 뿐이다. 그런 결과를 원할 국민도 없다. 따지고 보면 대법원장도 법관 중에 한 명일 뿐이다. 대법원의 재판장으로 재판권을 갖는 일원이고, 판사의 인사권과 대법원의 일반사무를 관장하며, 행정사무에 관해 직원을 지휘ㆍ감독하는 역할을 한다.
법관은 각자가 독립기관이고, 독자적으로 심판한다. 대법원장의 지나친 말이나 간섭은 법관의 양심적 판단에 영향을 줘 되레 경색된 재판을 유도할 뿐이다. 이용훈 대법원장이 검찰과 변호사를 비판해 법조계가 술렁거리고 있다. 검사와 변호사를 무시하는 듯한 그의 거침없는 발언에 급기야 검찰은 유감을, 변협은 대법원장직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잖아도 한 달 전 노무현 대통령이 지명한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후보가 야당의 반대로 국회 임명동의를 받지 못하고 있다.
가뜩이나 헌재가 소장의 공백으로 업무 차질이 예상되는 불안한 상황에서 대법원장까지 폭탄성 발언을 해 법조계를 요동치게 하고 있다. 그는 지난 19일 대전고법에서“검사들이 밀실에서 받은 조서가 공개 법정의 진술보다 우위에 설 수 없다”. “검사의 수사기록을 던져버리고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했다. 또 13일 광주고법에서는“변호사들이 내는 자료라는 게 상대방을 속이려는 문건이 대부분이다”고 했다.
공판중심주의 재판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한 발언이라지만, 검찰과 변호사들의 자존심을 흔들기에 충분한 말이다. 검찰의 유감 표명과 변협의 사퇴 주장까지 나온 걸 보면 자존심 손상 정도가 아니라,‘울분’을 감추지 못하는 수준이다. 하긴, 그의 발언에 공감이 가는 부분도 많이 있다. 일단, 검사와 변호사들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말의 취지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검찰은 강압적인 조사에 의해 조서가 꾸며지는 사례가 없는지, 조사 과정에 인권은 보장되고 있는지, 자성해 봐야 한다. 만약, 지금도 그런 수사가 이뤄지고 있다면 반성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변호사들도 진실을 찾으려고 애쓰기보다 거짓과 속임수로 법관과 방청객을 속이고, 법관에게 로비해서 유리한 재판을 얻어내고 있지는 않은지, 있었다면 각성해야 한다.
어쩌면 李 대법원장도 검찰과 변호사들의 반발을 예상하고 이런 발언을 했를지 모른다. 점잖은 표현을 쓰면 그 말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에 충격 요법을 쓴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로서는 파문으로 인한 손해보다 검찰과 변호사들이 달라지기만 한다면 성공적인 발언이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검찰과 변호사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고쳐나가는 문제와 검찰과 변호사의 역할을 부정하는 듯한 李 대법원장의 인식은 별개의 문제다. 검찰과 변호사는 물론 법관들에게도 대법원장으로서의 본분을 벗어난 월권적 발언이고“수사기록을 던져버려라”는 등의 원색적인 언급은 누가 들어도 거북한 말이다.
李 대법원장도 이 번을 마지막으로 법관들에게 인식 구속과 재판업무에 영향을 미치는 발언을 자제해야 한다. 법에 정해진대로만 대법원장의 직무를 수행하면 될 것이다. 대법원장이 중심을 잃게 되면 법조계 전체가 균형을 잃게 된다. 그 파장은 사회 전반에까지 미쳐 자칫 사법부의 불신을 자초할 수도 있다. 내일로 예정된 서울고법 방문에서 그가 또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는 말을 아껴야 한다는 것이다. 꼭 할 말만 하는 대법원장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김 광 호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