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결코 '반쪽발이'가 아니다
“........나는 가난해도 조국 조선에 살고 싶었다. 어릴 때 철들고부터 느끼게 된 주위 일본인들의 백안시하는 눈길은 적의와 증오와 좀 먹힌 인격을 형성하게 했다.........부모님은 고심 끝에 이 나라 시민권을 취득했다. 우리들은 법적으로 일본국민이 되었다..........아무리 비참하면 어떻고 아무리 가난한들 어떠랴. 진정한 동포들 사이에서 소년기를 보냈더라면 내가 이러한 인간이 되지는 않았을 것을.....그러나 벽은 두껍다. 내가 신뢰했던 휴머니스트를 자처하던 학우가 ‘조선인은 누추하고 교활하다’고 발언했을 때 나는 경악했다.........” 일본 와세다 대학생 양성명이 분신자살을 하면서 남긴 유서 내용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재일동포의 귀화문제를 논의할 때 자주 화제에 오르는 이야기가 되었다. 과거 일제의 수탈정책에 의해,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떠났고, 일제의 징용과 그리고 일시 귀국했다가 재도일한 경우, 학업 등을 위해 건너간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특히 제주출신은 4?사건의 후유증으로 건너간 경우가 많았다. 재일한국인사회 형성이 일본의 수탈정책을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듯이, 재일제주도민사회의 형성도 같은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제주도민들은 해녀로 출가했다가 눌러앉거나 밀항으로 건너가 숨죽이며 살아온 사람들도 상당수 있다. 대판의 이쿠노구에는 제주출신들이 밀집해 있기도 하다. 이러한 일본사회에서 재일동포의 인권과 문화사업을 위하여 애쓰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은 바로 김민주(金民柱), 고이삼(高二三), 양성종(梁聖宗)을 중심으로 한, 탐라연구회 멤버와 도서출판 신간사(新幹社) 사람들이다. 필자가 최근 소설집 「본풀이」를 발간하자마자 제일 먼저 세 사람에게 우송하였다. 탐라연구회장 김민주는 고맙게 회신까지 보내주었다. 그리고 나의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 「두 노인」을 탐라연구회에서 발간하는「濟州島」에 번역겮柰냘歐竪?하였다. 나이가 들었지만 그는 정정하게 회신까지 보내주었다. “............ ‘본풀이’ 속에서 ‘두 노인’을 읽었습니다. 조천중학원 출신 두 분을 소개하고 있었고 ○○○씨가 희생된 경과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실은 저도 조천중학원 출신입니다. 문장을 읽어가니 그때의 상항이 선하게 눈에 뜨입니다.....................” 김민주는 편지에서, 조천중학원 재학 당시 체포되어 동척회사에 수감 재판을 받고, 육지형무소를 거쳐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동원되고, 몇 개월 후에는 미군의 포로가 되어 거제도포로수용소, 부산, 영천을 거쳐 일본으로 밀항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자신의 처지를 밝히고 있었다. 그는 그 유명한 「제주도 인민들의 무장투쟁사」를 저술한 사람이다. 이 책은 4?에 관한 저술 가운데 좌파시각의 대표적인 기록물로 1963년 간행되었다. 그리고 고이삼하면 먼저 지문날인 반대 투쟁이 떠오른다. 그는 지문날인 반대 투쟁을 대중운동으로 이끌어 승리의 결실을 얻어내었다. 그는 또 ‘4? 사건을 생각하는 힘’의 멤버로 매년 4월에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양성종은 제주에 올 때마다 나에게 전화를 준다. 반가운 분이다. 아시다시피 신간사는 ‘4?을 말한다’를 비롯해 4? 관련 도서를 다수 발간해 왔고, 재일한국인에 관한 연구 학술서와 재일문인들의 작품 등을 다수 출판하고 잡지도 꾸준히 발간해 재일한국인들에 문화적 영향을 주고 있다. 그 외에도 하노소노대학 객원교수 강재언(姜在彦) 을 꼽을 수 있겠다. 1996년에 간행된 「강재언 저작선」은 한국학계에서도 주목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재일동포들을 향하여 ‘반쪽발이’‘한일 쌍방으로부터 백안시’등등의 표현에 계속 머물러야 할지, 이제 계속 관심과 배려가 필요한 때이다.
김 관 후 (시인/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