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호 칼럼] 드라마 같은 재판
며칠전 취임한 정갑주 제주지방법원장이 의미있는 말을 했다. 그는 법정을 법정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운영해 나가겠다고 했다.
법정드라마는 누가 보아도 흥미있고 재미있다. 특히 형사재판에 있어 검찰측과 변호인 간 치열한 공방이 볼 만하다. 피고인도 할 말을 다 한다. 검사는 수사기록과 증거를 들이대며 피고인의 죄를 입증하기 위해 열변을 토하고, 변호인은 무죄 또는 죄를 경감시키기 위해 자신이 직접 수집한 증거와 증인을 내세워 검사를 압박한다.
물론 흥미 위주의 드라마지만, 검사와 변호인이 물고 물리는 공방과 이를 통해 실체적 진실을 찾으려는 법관의 진지한 모습에서 진정한 법정의 의미를 확인하게 된다.
관건은 '공판중심주의'
그러나 공판중심의 심리가 이뤄지지 않으면 법정드라마 같은 법정 모습은 기대하기 어렵다. 정 법원장도 공판중심의 충실한 심리를 통해 국민의 신뢰와 공감을 얻는 법정을 만들겠다고 했다. 검찰이 제출한 수사기록 중심의 재판에서 실질적인 증거조사 등을 통한 법정심리 중심의 재판으로 탈바꿈시키겠다고 한 것이다.
당연히 법관의 심리가 심증 형성의 중심이 돼야 한다. 법관의 심증 형성이 수사기록에 의존돼선 안된다. 활발한 법정심리를 통해 피고인이 무슨 죄를, 어떻게, 왜 저질렀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그러려면 검사의 범죄 입증 노력과 변호인의 방어 역할, 그리고 피고인의 구체적인 진술이 필요하다. 특히 법관은 피고인에게 억울한 사정과 죄를 짓게 된 동기와 사정 등,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제공해야 한다.
수사기록에 의존한 재판은 수사의 연장선상에서 판단할 수 밖에 없게 된다. 피고인의 범죄 이유와 범죄 상황 등을 정확히 파악해 내지 못한다. 간혹 억울한 옥살이가 나오는 것도 공판중심에 충실하지 못한 결과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유.무죄가 번복되는 상황도 법정의 심리가 제기능을 다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이다.
들쭉날쭉 양형도 문제
양형을 결정하는 일도 대단히 중요하다. 재판 과정에서 당사자들이 할 말을 다 하고, 증거주의로 이뤄질 때 피고인도 재판의 결과에 순순히 승복할 것이다. 납득하기 어려운 양형 적용도 법원이 불신을 받는 이유가 되고 있다. 유사한 재판의 양형이 법관에 따라 최고 60% 정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니, 더 무슨 변명이 필요하겠는가.
양형의 불균형 문제는 법관들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인정만 하고 시정은 되지 않고 있다. 모르고 하는 일이라면 몰라도, 알면서 자기중심적 판단으로, 혹은 마음이 정하는대로 양형을 적용하고 있으니 더 큰 문제다. 그렇지 않고서야 유사한 형태의 피고인에게 각양각색의 양형이 선고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공판을 충실히 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에 따라 양형은 달라질 수 있다. 문제는 법관의 양형 판단에 변호사의 역할 또는 배경이 크게 작용한다는 점이다. 대체로 유능한 변호사일 수록 선고 형량을 생각보다 많이 낮추는데 성공한다. 변호사의 변론이 더 설득력을 얻을 경우 양형은 낮아질 수 있다. 이 경우 매우 바람직한 일로, 전혀 탓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피고인의 경제력과 변호인의 로비력 또는 전관예우 등 변호인의 위상 등에 의해 피고인의 양형이 달라진다. 설사, 공판중심주의 재판이 정착된다 해도 이런 문제가 먼저 해결되지 않으면 양심적인 재판도, 드라마 같은 법정도 공염불에 그칠 수 밖에 없다.
법관의 양심.탈 권위주의 시급
사실 공판중심 재판이 이른 시일에 정착된다는 보장도 없다. 법정이 건전하지 못한 유능한 변호사들에 의해 좌지우지될 때 공판중심 재판의 결과는 희망적이지 못하다. 변론을 잘한 진짜 유능한 변호사가 아닌, 전관예우 변호사와 친화력과 로비력이 뛰어난 변호사가 법정을 압도하는 한 드라마 같은 법정과 적정한 양형 선고는 기대하기 어렵다.
법원은 판사실에서의 변호사 접촉과 일반인의 판사실 출입을 억제한다지만, 만남의 공간이 어디 판사실 뿐이겠는가. 민나려고 만 마음 먹으면 언제 어디서든 법원 밖에서 만날수 있다.
결국 문제 해결의 관건은 법관의 양심이다. 양심이 제대로 서지 않는 한 은근히 변호사와 사건브로커의 유혹을 기대하게 되고, 유혹에 쉽게 빠지게 된다. 아직도 비양심적인 법관이 있다면 법조비리와 관련해 대법원장이 사과한 이번 기회에 새로운 법관으로 거듭나 주기 바란다.
'국민을 섬기는 법원'도 법관의 불친절 등 권위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한 구호에 불과할 뿐이다. 특권의식을 버리고, 사법서비스를 제공하는 법원 소속원으로서 항상 자세를 낮추려는 노력을 보여줘야 한다.
모든 법관이 오직 양심과 충실한 법정심리로 죄를 판단하겠다는 정신으로 무장해야 드라마 같은 법정도 정착될 수 있다.
김 광 호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