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감’과 ‘물러남’
조선의 큰 선비 이황(李滉)의 호는 퇴계(退溪)이다. 평생 ‘나아감’보다는 ‘물러남’을 희망하며 살았던 그는, 고향 마을 앞을 흐르는 토계(兎溪)의 이름을 따되 다만 ‘토’를 ‘물러날 퇴(退)’로 살짝 고쳐 사용하였다. 이처럼 퇴계는 호에서도 ‘퇴’자를 붙일 만큼, 꼿꼿한 선비로서 어려운 시대의 처신을 사퇴로 일관하였다. 너도 나도 벼슬을 탐하고 한번 관직에 나서기만 하면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리려 별의별 짓을 다하는 세태 속에서, 오히려 그는 사임을 덕목으로 삼음으로써 명망을 얻었다.
그의 성장기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이는 역시 어머니였다. 그의 모(母) 밀양박씨는 많은 학식을 갖추지는 못하였으나 소박하고 건전한 삶을 신조로,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읜 자식들에게 “항상 정직하게 살아야한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퇴계는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서는데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오르기까지 비교적 순탄한 관원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명종조(朝)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의 집에서 ‘썩은 고기 냄새가 진동하여 사람들이 코를 쥐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부정과 매관매직이 성행하게 되자, 과감히 물러남을 택하였다. 야인의 삶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그는 이로부터 죽는 순간까지 관직 물리치기를 무려 20여 차례나 반복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부패와 타락의 난정(亂政)으로 인해 몰락해 가던 현실을 깊은 학문과 풍부한 사상으로 구제하려 했던 것이다.
혼란한 시절 지조 있는 선비들은 정치에 나섰다가도 자신의 포부를 펴는데 합당치 않다고 사료되면, 언제든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산야(山野)로 돌아갔다. 하지만 실제로 벼슬을 사직하고 하야(下野)한다는 것은 욕심을 버리는 일이므로, 상당한 경지의 선비라야 가능한 것이요, 범상한 인물로서는 쉽지 않은 일임이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퇴계는 조용한 산림(山林)에 자리하여 독서와 사색으로 학문과 수양에 전념함으로써 모든 선비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행장진퇴(行藏進退)라는 말이 있다. ‘군자가 시세(時勢)에 응하여 벼슬에 나가기도 하고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한다’는 처세훈(處世訓)이다. 사람이 하는 일 대부분이 ‘나아가는 것’에 비해 ‘물러나는 것’이 더 어렵다. 이는 등산의 이치와도 같다. 정상에 다다르면 당연히 내려와야 하지만, 그 하산하는 것이 오르는 것보다 훨씬 험난하다.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데도 그게 용이하지가 않는 것이다.
이럴 때 퇴계의 ‘나아감’과 ‘물러남’의 철학은 우리들에게 많은 의미를 던져 준다. 과연 어떤 길이 옳은 방향일까. 자칫 소극적이고 현실 도피적이라는 오해와 비판은 받지 않을 것인가.
그렇지만 각 개인에게는 나름대로의 소신과 각오가 있는 법. 지금쯤 퇴진할 때가 됐다고 판단되면 물러나는 것이 당연하다. 꼭 외길만이 아니라, 다른 길을 통해서도 후진을 양성하고 이웃과 고향을 위해 이바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기 까닭이다.
한(漢)의 고조(유방)를 도와 항우를 무너뜨린 장량(張良)이 정계를 떠나면서 남겼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나는 어쩌다 황제의 스승이 되었고 지위는 열후(列侯)에 올랐다. 일개 평민으로서는 상상치 못할 최고의 영광이다. 이제 인간 세상의 일에서 일탈하여 조금은 쉬며 노닐고 싶다.” 진정한 퇴진은 이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1969년 ‘무관의 제왕’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언론인으로 출발한 이래, 기자와 대학교수로 37년을 일하여 왔다. ‘졸업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말과 같이, 퇴임을 ‘인생 제2의 출범’계기로 삼아 국가와 사회에 미력이나마 봉사하고자 한다.
이 용 길 (행정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