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가 권력이 된 디지털 세상
죠엘 슈마허 감독의 ‘‘Phone Booth” 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영화는 주로 뉴욕의 맨하탄 거리의 한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이루어졌다. 주인공은 핸드폰을 통해 거짓말로 한쪽을 속이고 이것을 미끼로 다른 경쟁사를 속여 일을 성사시키는 유능하지만 야비한 성격의 미디어 에이전트이다. 그는 아내가 있으면서도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공중전화 부스에서 다른 여자에게 전화로 소위 ‘작업’을 한다. 여느 때처럼 주인공이 전화를 마치고 나오는데 등 뒤로 벨이 울린다. 그리고 무심코 전화를 받는다. 그 순간부터 주인공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고 만다. 누구에게서 걸려온 지도 모르는 전화를 무심코 받은 주인공은 상대에게 완전히 노출된 상태에서 억압을 받게 된다. 주인공은 자신의 하루 일과에서부터 사생활까지 모든 정보를 갖고 있는 저격수의 총구가 자신을 향해 있음을 실감하며 공포감에 사로잡힌다. 저격수는 주인공을 살인자로 오해받게 만들고 그에게 거짓으로 일관된 자신의 삶을 대중 앞에서 고백하라고 강요한다. 그리고 자살하도록 유인한다. 전화를 끊을 수도 없고 자살할 수도 없는, 선택권이 없어져 버린 주인공의 삶. 저격수의 보이지 않는 총과 경찰들의 총구 또한 주인공을 향해있다. 저격수는 주인공에게 만일 공중전화 부스 밖으로 한 걸음이라도 나가면 아내나 여자친구 둘 중의 한 사람을 쏘겠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억압을 받고 있는 상태를 모르는 경찰 반장은 주인공에게 나오라고 설득하지만 그는 결코 나갈 수 없다. 그에게 공중전화 부스 속은 이미 탈출하기에 너무 늦어버린 어쩔 수 없는 ‘그 자신만의 세상’인 것이다. 결국 주인공은 밖을 향해 “이 속이 내 세계야”라고 거짓 외침을 한다.
공중전화 부스 안에 어쩔 수 없이 갇히게 된 주인공의 모습은 어쩌면 후기자본주의 속에 갇힌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전화선 하나로 운명이 좌우될 수 있을 만큼 누가 누구를 많이 아느냐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는 세상이다. 공중전화 부스 속 디지털 세상은 풍부한 정보로 시공간을 좁혀놓으면서도 모르는 사람과도 정보를 공유할 수 있을 만큼 또한 관계망이 넓어진 세상이다.
주인공은 희망한다. 공중전화 부스 밖을 향해 소리친 자신의 외침이 구불구불한 숲 속을 지나면서 샘물에 목을 축이고, 새소리에도 파묻혀보고, 그리고 다시 자신의 가슴에 돌아오는 아날로그 세상을. 그러나 그는 여전히 전화기를 내려놓을 수 없는 운명 속에 갇혀있다. 그가 이 세상을 탈출할 수 있는 길이란 자신을 향해 있는 저격수에 대한 정보를 자신이 더 많이 가지는 일이다.
영화는 결국 전화를 끊었어도 여전히 통화중임을 암시하는 반전으로 끝난다. 영화가 말해주듯이 지금은 자본력보다 정보력이 많은 사람이 권력을 쥔 세상이다. 그에 따라 후기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반성해나가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이어령은 요즘 정보화 사회, 후기산업사회에서 21세기를 예견한 책을 내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디지로그(Digilog)」이다. 디지로그(Digilog;; Digital+Analog)는 아날로그 사회에서 디지털 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 혹은 디지털 기반과 아날로그 정서가 융합하는 첨단기술을 의미하는 정보문화의 신개념이다. 정보사회가 일으킨 IT거품과 부작용을 개선하면서 도래할 후기정보사회의 선두주자로 디지로그가 떠오르고 있다고 한다. 그는 한국이 정보기술(IT)의 강국이 된 디지털 세상 속에서 그 한계를 진단하고 앞으로 다가올 후기정보사회의 밝은 미래를 모색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들고 나왔다.
그는 “디지털 세대들은 실제로 씹는 습관을 잃어가고 있다. 정보시대의 아이들은 클릭 하나로 삶의 문제들을 씹지 않고 삼켜버렸다“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부드럽고 달콤한 음식에 더 손이 많이 간다. 그러나 딱딱하지 않은 무른 음식만을 오랫동안 먹게 되면 잇몸이 약해진다. 때론 질긴 음식을 오래 씹을 필요가 있다. 질기지만 오래 씹다 보면 음식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간혹 빨리 갈 수 있는 편편한 도로를 벗어나 울퉁불퉁한 흙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다. 걷다가 작은 돌멩이에 걸려 뒤뚱거리면 길가에 피어있는 낮은 꽃들이 웃는 소리가 들리는 그런 길도 걸어보자.
변화가 빠른 디지털 세상에서 더블 클릭이 서투른 세대들은 그 빠른 변화 속에서 이 세상이 낯설게 느껴진다. 세상 흐름이 디지털로 흘러가니 그에 편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그 흐름에 한없이 실려 가다 보면 정작 자신의 의지는 잃게 되어 삶이 불안정하게 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가야 하는 일들과 길들여진 무의식 상태의 자신의 모습을 알아차리는 것이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정서를 융화시키는 첫걸음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서 있는 디지털 세상 속의 좌표는 누군가에게 노출된 어느 지점에서 아직도 통화중이지 않을까.
강 연 옥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