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돈 주먹 불끈 쥐고 앞을 똑바로 보라"

순탄치 않은 성장…학교 이전과 새로운 반전의 기회

2006-04-29     제주타임스

남주학원은 고 강성익 선생(호, 남주)이 사학설립을 통한 육영에 뜻을 두고 1953년 고향인 법환리에 있는 문전옥답(門前沃畓) 3천여 평을 처분하고 그 밖의 토지와 현금 등을 동원하여 1억5천만 원의 재원을 마련했다. 이 돈으로 1300평의 부지를 매입하고  3개 교실을 갖춘 기와지붕 건물 1채를 1954년 초에 준공했다. 이때부터 학교 설립에 필요한 서류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교육 당국을 방문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내게 된다.
남주 선생이 사학을 설립한다는 것에 대해 지방 인사들의 반응은 의외로 냉담했다. 그것은 1954년 5월 20일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고배를 든 적이 있는 선생이 사학을 설립하고 후학을 양성함으로써 그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하게 되었을 때, 정치에 뜻을 두고 있는 당시 지방 유력 인사들에게는 또 하나의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편견에서 오는 반응이었다.
남주 선생이 초대 민선도지사 선거유세(1960. 12.29.) 때 “나는 나이도 나이인 만큼 누구에게 아부할 일도 없고 재물도 탐내지 않겠으며, 나는 오로지 정의를 위해 싸울 뿐이다”고 역설한 내용에서 교육자로서의 그의 사상과 인생관을 들여다 볼 수 있다.
1954년 가을, 학교설립에 필요한 부지를 추가로 매입하고 제반 서류를 문교부에 제출하여 허가만을 기다리던 선생은 겨울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설립 인가를 재촉하기 위해 상경했다.
선생이 제출했던 관계 서류들이 담당자의 서랍 속에 사장된 채 처리되지 않은 것을 목격한 선생은 참담함을 느끼면서 관계자를 호되고 질타하고 인가를 독려했다. 그 결과 1955년 4월 9일 남주고등학원 설립 인가를 받게 되었고, 제주도 남제주군 서귀읍 서귀리 291의 3번지에 남주학원을 개원(開院)함으로써 남주고등학교의 초석을 놓게 된다.

▲ 건학정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앞을 똑바로 보라” 이것은 남주 선생이 생존시 학생들에게 반복해서 늘 하던 이야기로 지금도 졸업생들의 입에 회자(膾炙)되는 유언(遺言)이다.
두 주먹을 불끈 쥐는 의지와 눈앞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안목(眼目)은 질곡의 시기를 헤쳐 온 남주 선생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신적 자산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신은 전심(全心)으로 진지(眞智)를 사랑하는 성실한 태도를 통해서만 완성되고 계승될 것이다. 여기서 오늘날 남주고등학교 교훈인 <참되게 살자>의 정신적 원류를 찾을 수 있다.
남주 선생의 건학 정신은 오늘날에 계승되어 다음과 같은 건학 이념으로 구체화 되었다. ①합리적인 사고를 지닌 미래 지향적인 창조적인 인간 ②‘나’보다는 ‘우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공동체 의식을 지닌 신뢰하는 협동인 ③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주체성을 지닌 건전한 자율인 ④심신이 조화로움을 지닌 튼튼한 건강인을 육성함으로써 창조적이고 협동하는 자랑스런 한국인을 육성한다는 건학 이념으로 구체화 된 것이다.

▲ 남주학원의 성장기
남주학원을 본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펼치던 제5대 교장인 강보성 선생이 1966년 12월 7일 사임하고 같은 해 12월 22일에 조명철 교감이 교장 직무 대리를 맡으면서 남주학원의 중흥을 꽤하게 된다.
중학교 병설인가를 위해 노력한 결실이 1966년 12월 22일 남주중학교 6학급 설립 인가를 받게 되고, 8월에 착공했던 신축 교사(철근 콘크리트 2층 4개 교실 및 승강구 포함 총 128평)가 1967년 2월에 준공되면서 남주중학교가 출범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어 3월 10일 개교하게 된다. 이로써 남주학원은 중학교 6학급과 고등학교 6학급(주간 3학급, 야간 3학급)을 갖춘 학원으로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다.
고등학교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중학생 인적 자원이 필수적인 상황에서 남주중학교의 개교는 남주학원을 발전케 하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중학교 설립인가와 개교까지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교장이던 조명철 선생은 남주학원의 발전을 위해 제주도교육위원회에 중학교 설립의 당위성을 설명하면서 설립에 필요한 제반 서류를 제출했으나 도교위에서는 인적 자원의 부족함을 이유로 인가를 내주지 않았다. 조 교장은 이에 포기하지 않고 설립의 필요성을 담은 서귀포 시민들의 민원을 모아서 접수하였으나 특별한 이유 없이 다시 서류가 반려되었다.
설립 인가가 나지 않는 것은 단순히 교육 여건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가 개입되었음을 깨달은 조 교장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더욱더 강력한 조치를 취할 필요를 느껴 지역 사회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탄원서를 작성하여 관계부처에 접수하기에 이른다.
탄원서를 교육감, 문교부장관, 국회 의장에게 제출하는 한편, 당시 야당 제주도당 위원장이었던 강보성 전 교장이 야당 국회의원을 만나 협조를 구하고 문교부를 압박함으로써 드디어 장관은 제주도 교육감에게 ‘남주중학교 설립을 인가해주기 바람’이라는 메모를 전달하게 된다.
제주도 교육위원회는 어쩔 수 없이 인가를 해줘야 되는 상황에 접하게 되자, 부랴부랴 서귀중학교에 학급증설 신청을 하도록 명하여 교육위원회 회의를 열고 서귀중학교 1학급, 남주중학교 2학급, 모두 3학급 인가를 의결하게 된다.
‘두 학급도 자원이 없다던 당국이 세 학급을 인가하는 기막힌 사건,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참으로 기막힌 시대였다. 남주중학교를 개점휴업의 상태로 만들려는 음모였지만, 후기 모집 결과는 전기 서귀중학교에 합격한 학생들 다수가 남주중학교에 지원해버림으로써 도교육위원회의 계략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때 승리감을 만끽하며 환호하던 기억이 이제도 생생하다며, 교육을 정치로 재단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다 가버리고 없으니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남주는 그 서러운 역사를 안고 굳건히 발전해가고 있으니 그저 기억해 둘 뿐이다.’며 조명철 6대 교장은 회고하고 있다
남주고등학교는 병설중학교 설립운영으로 발전을 계속해 오다가 설립자의 장남인 제2대 강치남 이사장이 21세기 새로운 교육환경조성을 대비하여 1991년 현재의 위치인 동홍동 1907번지상의 학교부지를 매입하고 착공한지 1년 8개월여 만인 1993년 3월 20일 완공하여 학교를 이전하게 된다.
2만1926㎡의 교지에 14,132㎡의 운동장과 보통 교실 22개와 특별교실 11개(상담실,양호실, 방송실, 과학실, 음악실, 미술실, 기술실, 컴퓨터실, 어학실), 도서실 1개, 열람실 1개, 관리실 6개, 기타 12개를 갖추어 타 학교와 비교해서 부족할 것이 없는 교육 시설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쾌적한 자연 환경 속에 자리하고 있어서 학습 효과의 극대화를 기대하기에 충분한 면모를 자랑하고 있다.

강   선   종 (기획실장/수필가)